[아무튼, 주말]
대학생 교복이라는 ‘과잠’의 사회학
지난 20일 서울 동덕여대 교내에 학생들이 벗어둔 ‘과잠’ 수백 벌이 놓여 있다. 동덕여대 학생들은 대학 측의 남녀공학 전환 논의에 반대한다는 뜻으로 과잠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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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덕여대 학생들이 대학 측의 ‘남녀공학 전환’ 논의에 반발하면서 학내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눈에 띈 것은 일명 ‘과잠 시위’. 등판에 동덕여대라고 영어로 새긴 검은색, 감색, 핑크색, 빨간색 등 색색의 학과 점퍼 수백 벌을 길바닥에 벗어둔 것이다.
40대 이상 중장년층에서는 과잠 자체가 낯선 경우가 많다. ‘과잠’은 00학과(學科)에서 나온 ‘과’에 ‘잠바’가 붙은 말. 큰 틀에서 야구 점퍼 형태라는 점은 같지만 전공이나 동아리마다 과잠을 제작할 때 색상이나 캐릭터 자수 등으로 변주를 준다. 가령 연세대 전기전자공학부 과잠에는 연세대의 상징인 독수리 마크에 피카츄를 얹는 식. 주부 정희경(43·동덕여대 졸업)씨가 재학 중일 때는 없던 문화다. “후배들의 과잠 시위가 생소했어요. 소속감이 생겨 좋겠지만, 굳이 어느 학교 무슨 과라고 광고하고 다니는 게 창피할 것 같기도 해요. 저라면 입었을까? 글쎄요.”
◇'대학생 교복’ 된 과잠
요즘은 과잠 한 벌 없이 대학 시절을 보내는 경우는 찾기 어려울 정도다. 고려대 출신 직장인 조모(32)씨는 “대학 때 과잠만 5개였다”며 “야구 점퍼 형태의 과잠뿐만 아니라 겨울용 돕바 같은 것까지 골고루 갖춰 돌려 입었다”고 했다. “우리 학교에 입학한 게 너무 자랑스러웠어요. 과잠을 처음 입은 날 어깨가 절로 펴지는 것 같더라고요. 외투를 두루 갖춘 셈이니 따로 옷을 사지 않아도 돼서 어떤 맥락에서는 경제적이기도 했고요.”
바늘구멍 같은 입시 전쟁을 통과한 승자에게만 주어지는 트로피 같은 것, ‘학뽕(학교뽕)’이 차오른다. 고3인 김희성씨도 “서울대, 연고대 과잠을 입고 다니는 형들이 제일 부러웠다”며 “내년에 대학에 입학하면 당연히 과잠만 줄창 입을 것 같다”고 했다.
지난 20일 서울 강북구의 과잠 제작 업체 ‘캠퍼스룩’ 봉제 공장에 제작 중인 과잠이 쌓여 있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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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잠을 대학 교복이나 배지의 변형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과거에는 대학생들도 교복을 입었고 대학마다 배지가 있었다. 1980년대 초반 중고교 교복 자율화 정책이 도입되면서 대학생 교복 역시 유명무실해지며 사라졌다. 중앙대 82학번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중고교를 못 다닌 설움에 대학 입학식에 검은색 교복을 맞춰 입고 사각모까지 준비해 갔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입학식에 교복을 입은 사람은 두어 명뿐이었다고. 비슷하게 1970년대 대학생들의 ‘신원보증서’로는 대학 배지가 있었다. 대학 진학률이 30%에 못 미쳤던 시절, 대학생이라는 신분 자체가 계급장이었던 셈이다. 이 대학 배지를 이용해 명문대생을 사칭하며 사기를 벌이는 일도 왕왕 있었고, ‘얼마나 좋으면 수영복에도 달고 다니더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요즘의 과잠 역시 대학 입학이라는 성취를 이뤄냈다는 일종의 훈장이라는 것이다.
다만 현재 우리나라의 대학 진학률은 73.3%(2022년 기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44%)보다 훨씬 높다. 극단적 피라미드 구조로 상위권 대학에 들어가는 입시 경쟁이 치열할 뿐, 대학생 자체가 별난 신분은 아니다. 서울 성북구에 살고 있는 심모(41)씨는 “근처에 대학교가 많은데 정말 모든 대학생들이 다 과잠을 입는 것 같다”며 “내 기준으로는 별로 자랑할 만한 학벌이 아닌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도 모두 과잠을 입어서 신기하다”고 말했다. 20대들이 모이는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지잡대(지방 소재 잡다한 대학)인데 과잠 살까?’ ‘지잡대 애들이 과잠 입고 다니면 돌 맞나요’ ‘지잡대는 과잠에 대학 말고 과(科)를 영어로 적어 놓더라’ 등의 글이 많았다. 대학생의 교복이라지만 각자 처지와 상황에 따라 소속을 드러내는 게 부담이나 형벌이 될 수도.
◇서울대 럭비부가 원조?
대학가에서 과잠은 2000년대 후반 학번부터 유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운동권 문화가 강했던 1980~90년대에는 동아리나 과 단위로 ‘과티’를 주문해 입는 게 일반적이었다. 지금 같은 야구 점퍼 형태는 미국 하버드대 야구팀에서 점퍼를 만들어 입은 게 확산되면서 유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는 “1990년대 연세대 공대에서 시작됐다” “2000년대 서울대 럭비부가 원조다” 등 설이 분분하다.
다만 2000년대 초반까지는 ‘학벌주의’를 경계하는 문화적 분위기 탓에 널리 확산되진 않았다. 서울대 커뮤니티인 스누라이프 등에서는 과잠을 입고 다니면서 과시하는 게 적절한지에 대한 토론이 벌어질 정도였다. 서울 상위권 대학 사회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이모(43)씨는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대학가에 일종의 PC(정치적 올바름)주의가 있었다”며 “좋은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학벌을 내세우는 걸 민망해하고 조심하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사회학자 오찬호 박사는 과잠을 학벌이 치밀하게 서열화되는 현상과 연관시켜 분석했다. “2010년대 초반 과잠은 SKY 등 주요 대학에서만 확산하는 게 특징이었습니다. 명문대마다 ‘자율성’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면서도 학생들이 모두 같은 옷을 입었던 거죠. 대학 타이틀을 드러내는 게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명문대가 아니라면 학교 이름보다 법학과(Law) 등 전공과 글자 크기를 더 키우는 사례가 있었고, SKY에서 일부 학생들은 출신 고교까지(주로 명문고) 표기하는 사례도 나왔다. 오 박사는 “대학 간의 서열, 한 대학 안에서도 농어촌특기자 전형, 편입 출신과 다르다는 줄 세우기 현상이 명백하게 드러난 셈”이라며 “최근에는 대다수 대학에서 과잠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보급품 수준으로 보편화된 것 같다”고 말했다. ‘학벌 없는 사회를 위한 시민 모임’에서는 그 반작용으로 학교 이름이 들어가는 자리에 ‘EQUALITY(평등)’를 새긴 ‘안티 과잠’ 판매와 펀딩을 진행해 왔다.
반면 과잠이 거의 대부분의 대학으로 확산되면서 “위화감을 조장한다”는 부정적 인식은 누그러졌다. 서울대 사회학과 서이종 교수는 “평등의 문화가 익숙해지면서 자신의 소속을 과잠으로 보여주려는, 그것으로라도 자기가 노력해서 이 학벌에 들어왔다는 ‘셀프 인정’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서열은 더 촘촘해졌는데, 젊은 층은 수능 한두 문제 더 맞아 대학이 바뀌었다면 그것을 그대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욕구가 강합니다. ‘노고’를 쉽사리 인정하지 않는 문화와, ‘공정’의 가치를 구조적으로 보지 않는 현상 등이 반영된 거죠.”
학생회 출신인 직장인 오모(28)씨는 “요즘의 서열은 금수저냐 흙수저냐 논란이 더 핵심”이라며 “다 같이 과잠을 입으면 각자 가정의 경제력이 덜 드러난다는 장점도 있었다”고 말했다. “대학생 신분에도 명품을 입고 다니는 애들도 많아요. 하지만 ‘피어 프레셔(peer pressure·또래 집단의 압박, 눈치 보기) 탓인지 좀 지나면 교내에서는 모두들 과잠을 뒤집어쓰고 하나가 되는 분위기였습니다.”
◇태권도장·기업체도 과잠
소속감을 키워주는 과잠은 대학을 넘어 전방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일곱 살 아들을 둔 김모(40)씨는 “태권도 학원에서 ‘과잠’을 제작했다고 하는데 아이가 꼭 입고 싶다고 해 주문했다”며 “동네에서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고 했다. 근처 다른 태권도 학원이 ‘우리도 과잠을 만들자’는 민원에 시달려 뒤늦게 제작하고 있다고. “서로 ‘너는 어느 도장 소속이니?’ 하면서 파벌을 나누기도 하고, 같은 과잠을 입었다고 반가워도 하고 재미있어요. 어떤 부모들은 어른용까지 주문해 입었더라고요.”
일부 자사고, 예고 등 고교에서도 과잠 형태로 만들어 학생과 교직원들이 함께 입는 사례도 많다. 과잠 제작 업체인 캠퍼스룩 관계자는 “요즘은 태권도·유도 등 무술 도장과 기업체들의 주문도 많이 들어온다”며 “가격 측면에서 과거 유행했던 등산복이나 패딩점퍼 등의 단체복보다 경쟁력이 있다”고 말했다. 제작 단가는 주문 규모나 부자재 사용에 따라 달라지지만 3만~4만원대 수준이라고 한다. 과잠이 유행하기 시작한 10여 년 전과 비교해 비슷한 수준이거나 더 낮아졌다.
대학생이 아니더라도 과잠을 주문해 입는 경우도 많다. 꽤 많은 업체들이 주요 대학 과잠을 만들어 판다. ‘유니스00’라는 업체는 등판에 전공 없이 ‘KOREA UNIV.’와 호랑이 얼굴을 새긴 성인용·아동용 고려대 과잠을 팔고 있다. ‘아이가 워낙 가고 싶어 하는 학교라 응원과 격려 차원에서 주문했다’ ‘외국 친구에게 선물용으로 구입했다’ ‘졸업생인데 추억으로 주문했다’는 후기가 줄을 이었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에 따르면 인간은 가장 하위 단계인 생리적 욕구를 시작으로 안전의 욕구가 충족되면 ‘소속과 사랑의 욕구’를 추구한다. 존경과 자아실현 같은 상위 욕구 이전 단계다. 배부르고 등 따스하면 자연스럽게 소속감을 좇는다는 것. 2024년 대한민국에서 과잠은 그 상징물 아닐까. 동덕여대 학생들은 외투가 아니라 소속감을 벗어던지는 방식으로 변화에 격하게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김경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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