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최여정의 다정한 안부]
몸을 숨기다가 들켰다
그때 내 입에서 나온 말
일러스트=김영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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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 20년 전 헤어졌던 그 사람. 버스에 오르는 옆모습만으로도 단박에 알아봤다. 아, 왜 하나도 안 변한 거야. 차라리 못 알아볼 정도로 배가 나오거나 머리가 빠지거나 그랬으면 좋았잖아. 20년 만에 버스에서 만나 ‘잘 지냈니’ 같은 어색한 인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20년 전 헤어질 때 모습 그대로, 그렇게 서로에게 기억되는 게 낫겠다 싶었다.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서서히 몸을 의자에 미끄러지듯 구겨 넣으며 휴대폰에 얼굴을 묻었다. 하지만 온 신경은 머리 끝까지 곤두서서 마치 정수리에 눈이 달린 듯했다. 교통카드를 찍고 몸을 돌려 서서히 내가 있는 뒷자리로 다가오는 그가 느껴졌다. 나는 숫제 몸을 폴더폰처럼 접어버렸다. 그가 나를 지나쳐 간다.
대학 졸업 무렵, 외국계 회사의 고급 사무실이 즐비한 강남 오피스 가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그를 만났다. 점심식사를 하며 비즈니스 미팅을 하기에 좋은 분위기와 음식이 있어 인기가 많은 곳이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붐비는 점심식사 준비부터 마무리까지만 하면 되니 저녁에는 학원에 다닐 수도 있었다. 검색을 하다가 발견한 좋은 조건 앞에서,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본 게 전부인데 레스토랑 서빙을 잘할 수 있을까’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바로 전화를 걸어 면접을 봤다.
일본 영사관에서 일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친절한 부부가 함께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서빙 아르바이트는 해본 적 있느냐는 질문에 사실대로 답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다고. 부모님과 진로 문제로 갈등이 있어서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이제 제 힘으로 해야 한다고. 부부는 잠깐 서로를 바라본 뒤에 말했다. “그래요. 같이 일해 봐요.”
그곳에서 일한 반 년의 몇 장면이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마치 사진처럼 떠오른다. 바쁜 시간을 보내고 사장 부부와 주방장까지 함께 지금도 내 인생 최고로 손꼽는 김치볶음밥으로 늦은 점심을 먹던 기억, 음악 애호가였던 사장님이 수집한 LP판을 하나씩 들어보던 기억, 가끔 저녁 아르바이트생 대신 일을 돕다가 사장 부부와 홀짝이던 진한 위스키 한잔의 기억들. 물론 좋은 기억만 있었던 건 아니다. 인생사가 그럴 리 없으니.
예약석으로만 운영하던 로비 안쪽의 가장 큰 테이블에 손님 8명이 온 날이다. 감색 슈트와 브라운 슈즈가 멋있게 어울리는 중년 외국인 몇몇과 키가 큰 젊은 한국인 남성 중에 눈이 부시도록 하얀 원피스를 입은 한국인 여성이 유독 돋보였다. 준비한 코스 요리를 차례차례 내어 가는 것이 내 일이었다. 일을 시작한 지 반년이 가까워져 식기들을 놓고 치우는 일이 꽤나 능숙해졌을 때인데, 이상하게 그날 따라 하얀 원피스의 그녀 앞에서 작은 실수가 이어졌다. 접시 위에 포크를 큰 소리가 나게 떨어뜨리질 않나, 물컵에 물이 넘치도록 따르질 않나.
그래도 식사가 어찌어찌 마무리되어 가고, 디저트만 남았다. 지니의 요술 램프처럼 생긴 반짝이는 은그릇 안에 그녀가 주문한 벨기에 초콜릿 아이스크림이 커다랗게 한 숟가락 담겨 있었다. 그녀 앞으로 그릇을 옮기는 그 순간, 마치 요술처럼 내 손가락 사이로 마술 램프의 주둥이가 스르르 미끄러졌다. 야구공만 한 초콜릿 아이스크림이 그녀의 가슴으로 툭 떨어졌다. 아이스크림 공은 가슴의 굴곡을 따라 빠르게 구르며 진한 고동색 자국을 남기더니 무릎에서 간신히 멈춰 섰다. 손 쓸 새도 없이 일이 벌어진 판에, 하얀 원피스에 초콜릿 아이스크림이 그린 한 줄기 선이 잭슨 폴록의 추상화에 뿌려진 물감 같다,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의 손이 내 뺨에 올라붙었다. 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흐릿해진 눈에, 사장님 부부가 얼굴 벌게진 그녀에게 몇 번이나 허리 굽히며 세탁비를 드리겠다는 사과의 말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 옆자리의 젊은 남성이 일어나 화를 잠재우지 못하는 그녀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날의 내 기억은 여기까지였다. 점심시간의 소란함이 언제 끝났는지 모르게 조용한 가게에 앉아 사장님 부부 품에 안겨 좀 울었던 것 같다. 괜찮다고, 얼마나 놀랐냐고 다독여주는 그 품이 따뜻해서 더 눈물이 난 것 같았다. 그렇게 늦겨울 오후 햇살이 지고 있는데, 빈 가게로 아까 그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내 앞으로 뚜벅뚜벅 다가와 죄송합니다,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 뒤에 우리는 연인이 되었고, 그는 유학을 떠났고, 우리는 결혼의 문 앞에서 헤어졌다.
삐익- 버스 하차 전자음이 길게 울린다. 그가 다시 내 곁을 지나간다. 버스가 멈추고 그가 내린다. 그가 자리에 선 채 버스 창을 올려다봤다. 버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서로 한참 바라봤다. 그가 웃는다. 나는 입을 동그랗게 오므려 속삭였다. 잘 지내!
[최여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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