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이 세계올림픽도시연합(WUOC) 회의를 마치고 지난 13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해 인터뷰를 하고 있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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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문화체육관광부가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에게 직무정지를 통보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전날 국무조정실 정부합동 공직복무점검단이 밝힌 이 회장의 비위 혐의를 토대로 한 조치다.
점검단 조사에 따르면 이 회장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직원을 향해 "넌 문체부 XX야, 체육회 XX야" 등의 폭언을 쏟아낸 건 기본, 자격조건이 되지 않는 자녀의 대학 친구를 선수촌 직원으로 채용하기 위해 내부 담당자들에게 자격 요건 변경을 압박하기도 했다. 이를 거부한 직원은 인사조치를 당했다. 이 밖에 물품 후원요구(금품 등 수수), 후원 물품의 사적 사용 등의 정황도 포착돼 점검단은 이 회장을 수사 의뢰했다.
3선 연임이 임박한 이 회장은 비위 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정면충돌을 택했다. 곧장 직무정지 취소 소송 및 집행 정지 가처분 신청을 낸 데 이어 법원의 판단이 나오기도 전에 보란 듯이 자신의 집무실로 출근해 업무를 강행했다. 같은 날 충북 진천선수촌을 찾아 2025년 동계아시안게임 관련 현황을 보고받기도 했다. 이에 문체부는 "초법적 행위"라며 추가 징계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
24년 전 우연한 기회로 체육계와 인연을 맺고 '체육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이 회장이 남긴 논란의 발자취들을 '이달의 스포츠 핫피플'에서 돌아봤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이 지난달 22일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 의원 질의를 듣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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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납품하다 체육계와 인연 맺어
1955년생인 이 회장은 사회 초년생 시절 이민우 신한민주당 총재 비서관으로 잠시 정치권에 몸담았다. 이후 1989년 골재 생산 업체를 설립하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1990년대 신도시 건설 붐 특수를 누리며 큰돈을 벌어들였을 뿐만 아니라 경기 하남시 미사리에서 채취한 모래를 대한주택공사에 납품하면서 체육계와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1985년부터 현재까지 대한근대5종연맹 당연직 회장사를 맡고 있는 대한주택공사는 2000년에 이 회장을 근대5종연맹 부회장에 임명했다. 선수 출신도, 체육 전공자도 아닌 이 회장이 체육계에 발을 내딛게 된 배경이다.
이 회장은 체육계 내 자신의 입지를 빠르게 넓혀갔다. 2004년 대한카누연맹 회장을 거쳐 2010년 대한수영연맹 회장을 맡았고, 2013년엔 제38대 대한체육회장 선거에서 용인대 총장 출신의 김정행 회장을 도운 공로로 대한체육회 수석부회장에 임명됐다. 그리고 마침내 2016년 국민생활체육회와 통합된 대한체육회의 초대 회장으로 올라섰다.
2012 런던올림픽에 참가하고 있는 이기흥(오른쪽 앞줄 두 번째) 당시 한국선수단장과 대회 메달리스트들이 2012년 8월 9일(현지시간) 6·25 참전 용사비가 있는 런던 시내 세인트 폴 대성당을 찾아 참배했다. 런던=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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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환 포상금 미지급, '폭행 피해' 심석희에 2차 가해... 끊이지 않는 논란
2018년 불거진 '심석희 사태'에 대한 이 회장의 대응도 적잖은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가 조재범 전 대표팀 코치로부터 상습 폭행 및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해 국민적 공분이 일고 있던 와중에 이 회장이 심석희를 만나 "조 전 코치를 복귀하게 해주겠다"는 황당한 발언을 한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관련 보도 직후 이 회장은 심석희와의 만남 자체를 부인했으나, 문제의 자리에 함께 있었던 전명규 전 빙상연맹 부회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당시 상황을 증언하자 "심석희를 만났지만 발언은 하지 않았다"고 입장을 바꿨다.
이기흥(뒷줄 왼쪽) 대한체육회장과 정몽규(앞줄 오른쪽) 대한축구협회장이 지난 9월 2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 열린 대한축구협회 등에 대한 현안질의에 출석해 인사하고 있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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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부 반대파' 이기흥의 화려한 부활... 깊어진 갈등의 골
문체부와는 수영연맹회장 시절부터 대립했다. 당시 이 회장은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를 통합하려는 문체부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며 대립했다. 이를 통해 자신을 '체육계 발전을 위해 정부에 맞서는 인물'로 포장하면서 업계 민심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 회장이 집권한 6년간 '비리의 온상'이 된 수영연맹이 체육회 관리단체로 지정되면서 이 회장 또한 연맹 회장직을 내려놔야 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의 불명예 퇴진으로 마무리되는 듯했던 문체부와의 갈등이 다시 시작된 건 그로부터 6개월 뒤다. 이 회장은 2016년 10월 5일 열린 제40대 체육회장 선거에서 총투표수 892표 중 294표를 받아 통합 체육회의 초대 회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2위 장호성 당시 단국대 총장(213표)과 3위 전병관 전 경희대 교수(189표), 4위 이에리사 전 국회의원(171표)으로 표가 갈리면서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반전 시나리오가 탄생한 것이다.
스위스에서 열린 세계올림픽도시연합 스포츠 서밋 출장을 마친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이 지난 13일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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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 연임 제한 규정 폐지에 문체부, 수사 의뢰 초강수 카드
체육회와 문체부의 갈등은 이 회장의 3연임 사전정지 작업을 기점으로 더욱 깊어졌다. 내년 초 임기를 마치는 이 회장은 3연임 도전을 앞두고 지난 5월 말 이사회에서 임원의 연임 제한 규정 철폐 등의 내용을 담은 정관 개정을 의결했다. 체육단체 등 임원이 3선에 도전하려면 체육회 산하 스포츠공정위원회 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이 규정을 없앤 것이다. 체육회 측은 회장을 구하기 힘든 지방체육회 사정 등을 고려할 때 연임제한을 풀어야 한다고 설명했지만, 문체부와 업계는 이를 이 회장의 장기집권을 위한 포석이라고 봤다.
유인촌 장관은 체육회의 연임제한 폐지 개정안을 거부하겠단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럼에도 이 회장이 뜻을 굽히지 않자 '수사 의뢰' 카드를 꺼내 들었다. 진천선수촌 시설 관리 용역 계약과 관련해 체육회를 수사 의뢰한 것이다. 그러자 이 회장은 "왜 3년 전 일을 지금에야 고발했는지 모르겠다. 어떤 분들은 (수사 의뢰가) 다가올 대한체육회장 선거 개입이라는 얘기까지 한다"며 직접적인 불만을 털어놨지만, 정부 압박과 비난 여론에 못 이겨 연임제한 폐지 개정안에서 대한체육회장을 제외하는 것으로 한발 물러섰다.
이기흥 대한체육회 회장이 지난 7월 20일(현지시간) 파리 샤를드골 국제공항에서 입국하고 있다. 파리=서재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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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계 결집하려다 국회마저 '적'으로 돌리기도
갈등은 2024 파리 올림픽으로도 번졌다. 대회를 마치고 돌아온 이 회장이 선수단 피로를 이유로 갑작스레 환영 행사 불참을 선언하며 '장관 패싱'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로 인해 선수단을 격려하려 공항에 나갔던 유 장관과 장미란 문체부 2차관은 선수단을 제대로 맞이하지 못했다. 당시 이 회장이 직원들에게 "문체부 장관이 (해단식) 행사에 온다면 당신을 인사조치하겠다"고 압박한 사실이 최근 국조실 조사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대한체육회 스포츠공정위원회가 이기흥 회장의 3연임 출마 승인 여부를 심의한 지난 12일 서울 송파구 대한체육회 로비에서 체육회 노동조합원들이 이 회장의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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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에 선 이기흥... 위기의 '3선 도전'
깊어진 갈등 끝에 수사의뢰와 직무정지 상황까지 벌어지며 현재 이 회장은 벼랑 끝에 섰다. 지난 12일 스포츠공정위원회가 이 회장의 연임을 승인하면서 기사회생했지만, 유 장관이 "(체육회장에) 당선되더라도 우리가 승인을 하지 않을 수 있다. 행정 소송까지도 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3연임까지의 길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최근 유승민 전 대한탁구협회장과 강신욱 단국대 명예교수, 김용주 전 강원도체육회 사무처장, 박창범 전 대한우슈협회장, 강태선 서울시체육회장, 안상수 전 인천시장 등이 차기 체육회장에 도전장을 내미는 등 경쟁자들도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회장 출마자는 이 회장 임기 만료일인 내년 2월 27일 기준 90일 전인 이달 29일까지 후보 등록 의사를 표해야 한다. 이 회장도 3연임에 도전하려면 29일 오후 6시까지 사직서를 제출해야 한다. 이후 정식 선거 후보 등록은 내달 24, 25일 양일간 진행된다. 선거는 내년 1월 14일이다. 이날 한국 스포츠의 운명을 쥔 새로운 누군가가 탄생할지, 또 한 번 '이기흥 천하'가 이어질지에 많은 이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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