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8 (목)

반성 없는 일본, 무능한 한국 외교에 제2 군함도 된 '사도광산 추도식'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희생자 애도보다 세계유산 등재에 초점
"한국 측 한마음 애도 어려웠을 것" 지적
이쿠이나 "조선인 가혹한 환경서 종사"
야스쿠니신사 참배 논란에는 침묵만
한국일보

이쿠이나 아키코(가운데) 일본 외무성 정무관이 24일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 사도섬 아이카와개발종합센터에서 열린 '사도섬 광산 추도식'에 일본 정부 대표자로 참석해 헌화하기 위해 헌화대로 이동하고 있다. 사도=류호 특파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조선인 등 희생 노동자들을 기리겠다며 마련된 '사도광산 추도식'이 한국 측 불참 속에 진정성 없는 반쪽짜리 행사로 전락했다. 일본 측은 희생자 애도보다 사도광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축하에 무게를 둬 추도식 취지를 퇴색시켰다. 계속되는 일본의 반성 없는 태도와 한국 정부의 외교력 한계가 사도광산 추도식을 '제2의 군함도 사태'로 만들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본 니가타현과 사도시, 민간단체로 구성된 사도광산추도식실행위원회는 24일 오후 니가타현 사도섬 서쪽에 있는 사도시 아이카와개발종합센터에서 자국 인사만 참석한 채 '사도섬 광산 추도식'을 개최했다. 한국 측 추도식 보이콧으로 일본 측 인사 50~60명만 참석했다. 애초 참석 예정자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일본 측에서는 정부 대표인 이쿠이나 아키코 외무성 정무관(차관급)을 비롯해 하나즈미 히데요 니가타현 지사, 와타나베 류고 사도시 시장 등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희생자 애도보다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감사' 표현을 쓰며 세계유산 등재를 자축하는 자리로 만든 것이다.

이쿠이나 정무관은 "(사도광산은) 역사상 특히 주목해야 할 가치"라고 말했고, 와타나베 사도시장도 "지역의 자랑이자 세계의 보물로, (등재에)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추도식을 지켜본 아라이 마이 사도시 의원은 "한국 측이 참가했어도 (일본 측과) 한마음으로 추모하는 자리가 됐을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앞서 지난 7월 한일 양국은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에 합의하면서 추도식을 개최하기로 했다. 이후 참석할 정부 인사 급 문제 등을 두고 의견을 좁히지 못하다 지난 20일 추도식 개최에 최종 합의했다.

한국 정부는 추도식에 박철희 주일대사를 비롯해 정부 측 인사를 참석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외교부는 지난 23일 "외교 경로를 통해 일본 측에 (추도식) 불참을 통보했다"고 밝혔다.

한국 측 보이콧의 가장 큰 이유는 이쿠이나 정무관이 일본 정부 대표로 참석했기 때문이다. 이쿠이나 정무관은 참의원 초선 의원으로, 2022년 8월 15일 일본 패전일에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 또 2022년 참의원 선거 당시 일본 언론 조사에서 "한국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동원 문제에) 더 양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정부는 야스쿠니신사 참배 전력이 있는 이쿠이나 정무관 참석으로 진정성 있는 추도식 진행이 어렵다고 본 것이다.

또 일본 정부가 협상 과정에서 행사 공식 명칭에 '감사' 표현을 반영하자고 주장한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일보

24일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 사도섬 아이카와개발종합센터에서 열린 '사도섬 광산 추도식' 참석자들이 묵념하고 있다. 사도=류호 특파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일본 측은 이쿠이나 정무관 논란을 의식한 듯 그의 입·퇴장에 각별히 신경 썼다. '007 작전'을 방불케 하듯 기자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행사 시작 1시간 전인 이날 낮 12시 5분쯤 정문이 아닌 옆문을 통해 조용히 행사장에 들어왔다. 행사가 끝난 뒤 바로 빠져나갈 수 있게 옆문에 미리 차도 대기시켰다.

이쿠이나 정무관은 행사에서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라고 해도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땅에서 위험하고 가혹한 환경에서 곤란한 노동에 종사했다"며 조선인 희생자들에게 애도의 뜻도 밝혔다. 그는 이어 "종전까지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고, 유감스럽지만 이 땅에서 돌아가신 분들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강제동원' 같은 노역의 강제성을 인정하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한국일보

이쿠이나 아키코(가운데) 일본 외무성 정무관이 24일 니가타현 사도시 사도섬 아이카와개발종합센터에서 열린 '사도섬 광산 추도식'이 끝난 직후 미리 대기한 차량에 타기 위해 옆문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사도=도쿄 특파원 공동취재단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의 추도식 불참 결정에 공식적으로 유감도 표했다. 주한국 일본대사관은 "일한(한일) 정부 간 정중한 의사소통을 해 왔다. 한국 측 불참에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에 불만을 제기하며 반발하기도 했다. 한 외무성 간부는 일본 교도통신에 "한국이 국내 여론에 과잉 반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한국 정부의 협상력 부족이 사태를 키웠다는 지적도 나온다. 협상 내용보다 합의 여부만 집중한 탓에 군함도 사태를 재현한 꼴이 됐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 대표로 정무관을 참석시키는 데 급급한 나머지 참석자 이력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고, 지난 22일 밤에는 '일본 측이 한국 요구를 수용한 것'이라고 했다가 하루 만에 불참으로 입장을 번복하며 오락가락 행보를 보였다.

일본 정부는 2015년 군함도(일본명 하시마)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는 대신 강제동원 실상을 반영한 전시 시설을 설치하기로 했다. 그러나 2020년 3월 개관한 도쿄 산업유산정보센터에 강제동원 역사를 반영하지 않아 한국이 뒤통수를 맞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한편 한국 유족 9명은 이날 사도광산 강제동원 희생자 관련 시설을 시찰했고, 25일 오전 박철희 대사와 함께 조선인 기숙사였던 '제4상애료' 터에서 별도 자체 추도식을 열 계획이다.


사도= 류호 특파원 ho@hankookilbo.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