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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도덕적 우월감’은 독약이다 [강준만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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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대선 다음날인 11월6일(현지시각) 플로리다주 웨스트팜비치 컨벤션센터에 나타나 지지자들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웨스트팜비치/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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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 전북대 명예교수



20년 전 미국에서 출간된 ‘캔자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라는 책을 다시 읽어본다.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로 끝난 미국 대선 결과를 음미해보고 싶어서다. 저자인 언론인 토머스 프랭크는 한때 미국 진보세력의 산실이었던 캔자스가 이젠 극우 지역으로 변했다며 이렇게 말한다. “캔자스는 모든 것이 평균인 땅이지만 그 평균의 특성은 일탈과 호전성, 분노다. 오늘날 캔자스는 일상생활의 구석구석까지 반동의 선전으로 점철된 보수주의의 성소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프랭크의 책에선 민주당의 위선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낙태 문제 등 사회문화적 가치와 종교적인 원인이 언급되었지만, 이 책이 보수에 대해 워낙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바람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겠다. 즉, 캔자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탐구한 이 책 자체가 그런 변화의 원인이라고 할 특성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심리학자 키스 스타노비치는 이 책에 대해 “이런 주장을 펼치는 교육받은 자유주의자는 아마도 이런 입장인 것 같다”며 “다른 유권자들은 절대 그들의 금전적 이익에 반하는 투표를 해선 안 되지만,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은 비합리적이지 않다. 왜냐? 나는 깨어 있는 시민이니까”라고 꼬집었다. 프랭크의 입장을 그렇게까지 보는 것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깨어 있지만 너는 어리석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유권자들이 많으며, 이들이 오만한 착각을 하고 있다는 데엔 흔쾌히 동의할 수 있다.



2003년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지명전에 참가했던 존 에드워즈는 “지난 수십년 동안 민주당이 끊임없이 저지른 죄악은 (남에게 과시하는 걸 좋아하는) 속물근성이었다”고 했는데, 민주당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그런 ‘도덕적 우월감’이라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럼에도 달라질 기색이 전혀 보이질 않으니, 그게 민주당의 속성이거나 본질인가 하는 생각마저 갖게 된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와 맞붙었던 힐러리 클린턴은 “극히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트럼프를 지지하는 절반을 개탄할 만한(deplorable) 집단이라고 부를 수 있다”, “트럼프의 뒤에 선 절반의 사람들은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등과 같은 최악의 실언을 하고 말았다. 그런 ‘오만의 악몽’이 2024년 대선에서도 되살아났다. 트럼프의 뉴욕 유세에 찬조 연설자로 나선 한 코미디언이 미국령 푸에르토리코를 “쓰레기 섬”이라고 부르자, 대통령 조 바이든은 민주당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를 돕겠다며 “유일한 쓰레기는 그(트럼프)의 지지자들뿐”이라고 했으니, 이 노릇을 어찌할 것인가.



중요한 건 그런 실언 자체라기보다는 실언의 모태가 된 도덕적 우월감이다. 워싱턴포스트는 해리스의 패인으로 “트럼프가 얼마나 끔찍한 사람인지에 초점을 맞춘 선거운동을 벌였다”고 지적했다. 사실 도덕적 우월감에 충만하다 보면 ‘먹고사는 문제’보다는 도덕적 비교우위를 발휘할 수 있는 사회문화적 이슈에 치중하기 마련이다.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는 그런 우월감은 정치적 독약일 수 있다는 걸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기득권 정치세력은 현실을 부정하고 있다. 그들은 트럼프의 당선을 정치적 피해망상, 외국인 혐오증, 백인 기독교 우파, 인종주의, 여성혐오 탓으로 돌리고 있다. 틀렸다. 2016년에 이어 2024년에도 트럼프는 공장이 문을 닫고 양질의 일자리가 사라져버린 지역에 사는 수백만 노동자의 표심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한겨레21, 2024년 11월15일치)



앞서 언급한 프랭크의 책은 국내에선 2012년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되었는데, 이 제목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한 것 같지 않다. 이번 대선을 거치면서 “이제 민주당은 고소득층의 정당, 공화당은 저소득층의 정당이 됐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이를 다룬 미국 정치학자 박홍민의 한국일보 칼럼 제목이 흥미롭다. “허풍 떤 트럼프보다, 훈계질과 잘난 척하는 해리스가 더 미웠다.”



민주당의 정치 분석가인 크리스 코피니스는 “민주당은 죽었다”며 “이 나라 엘리트들은 ‘트럼프를 파괴하려는 의제보다 우리 문제에 집중해달라’는 노동자와 중산층 유권자들의 4년간 외침을 귀담아듣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한국계로는 첫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된 민주당 하원의원 앤디 김은 “우리 안의 오만함을 내려놓자”며 “우리가 모든 답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가서 시민들의 얘기를 듣자”고 했다. 한국의 정당들도 당장 실천해야 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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