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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매경춘추] 성장과 낭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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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10년 전쯤(10년 전이라니, 세월이 무상하다) 성인 발레를 배운 적이 있다. 뜬금없이 왜 발레를 배우기로 한 건지는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몸치에 박치였고 운동신경도 부족했다. 그렇다고 무언가를 성실하게 배우는 부류의 사람도 아니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강습마다 나는 꼬박꼬박 지각을 했다. 10분, 20분, 심지어는 30분 정도. 매번 늦는 나 스스로가 너무 한심했는데, 다음 시간에도 나는 어김없이 강습이 시작되고 한참이 지난 후에 민망해하며 스튜디오 문을 열곤 했다.

보통 3~4개월, 길어봤자 6개월이 지나면 수강생들은 중급반으로 갔다. 그렇지만 나는 거의 1년을 초급반에 머물렀다. 처음에는 중급반으로 올라갈 실력이 되지 않았고, 시간이 조금 지나서 배운 동작들을 얼추 비슷하게 흉내 낼 수 있게 되었을 때에는 만족했기 때문에 더 이상 새로운 걸 배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발레를 하는 게 아주 즐거운 일도 아니었지만 더 이상 나를 괴롭히는 일도 아니었다.

어느 날 선생님이 이제는 더 이상 참아줄 수 없다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에 계속 계시면 안돼요. 더 어려운 걸 배우셔야, 여기서 배운 동작들을 더 잘하실 수 있을 거예요. 똑같은 것만 반복해서는 안돼요."

여기에 계속 계시면 안돼요. 이상하게도 그 말이 너무 생생하게 다가왔다. 나는 발레를 1년이나 배웠지만 더 잘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발전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거, 그건 큰 문제인지도 몰랐다. 더 어려운 걸 배워야,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만, 지금 단계의 동작들은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다. 여기에 계속 머무는 건, 더 잘할 기회를 발로 차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한곳에 계속 머무는 건, 나 자신을 낭비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생각이 내 마음을 찔렀다. 나는 다음달부터 중급반에 나가기 시작했다.

중급반에 간 지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 나는 발레를 그만두었다.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는 모르겠다. 그냥 어느 날 문득 더 이상 배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 이런 궁금증이 든다. 만약 내가 계속 초급반에 머물렀더라면 발레를 계속했을까?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은 채로 무언가를 지속할 수 있을까? 그렇게 계속 무언가를 하는 게 이득인 걸까? 아니면 한 번이라도 그 이상의 단계를 밟았고, 더 이상 시간 낭비를 하지 않게 된 게 이득인 걸까? 솔직히 여전히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뜬금없지만 이렇게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성장하지 않겠다! 분명 성장하지 않는 것은, 도태되는 것이다. 그것은 머무르는 것과도 다르다. 계속 뒤로 밀려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죽음과도 비슷한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성장하지 않겠다. 여기에는 이상한 슬픔이 있다. 누구도 그것을 바라지 않고, 나도 그런 것 같다. 하지만 그냥 그렇게 된 거라면 어쩌겠는가? 아무리 애써도 그 자리라면? 그래도 거기에 무언가가 있어야 하지 않나? 남들이 다 앞으로 가고 난 뒤에도, 아무도 있고 싶지도, 가고 싶지도 않는 그 자리에.

그것을 뭐라고 부를까? 원칙? 아니면 그저 생(生)이라고.

[손보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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