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6 (화)

“트럼프의 장사꾼 기질 이용하는 우크라”…한국이 받을 것과 내어줄 것 [매경포럼]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2017년 1월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서 한달여 뒤 키이우에서 만난 올렉산드르 찰리 우크라이나 전 외교부 1차관 발언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찰리는 “트럼프 당선을 환영한다”며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에 기회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2016년 미 대선을 앞두고 오르반 빅토르 총리가 있던 헝가리를 빼면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다수 유럽 국가들은 트럼프 대신 힐러리 클린턴을 대놓고 지지했다. 그러니 트럼프가 당선되자 헝가리를 제외한 유럽 각국은 멘붕이 됐다. 그런 와중에 외교부 차관까지 지낸 분이 ‘트럼프는 기회’라고 한 말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당시엔 트럼프에 대한 분석도 별로 없어 지금처럼 카멜레온 같은 그의 모습이 드러나기 전이었다. 찰리는 “트럼프가 푸틴과 모종의 합의를 통해 (우크라이나가) 분쟁중인 동부 지역 해법을 찾게 해줄 것”이라고 했다. 또 “힐러리가 이겼다면 동부를 놓고 분단과 분쟁이 고착화되는 옵션밖에 없다”고도 했다.

이후 우크라이나 정세는 찰리의 기대대로 흘러가진 않았지만 지금의 우크라이나 전쟁을 멈추는데 트럼프가 차라리 낫다는 점에서 찰리의 혜안은 진행형이다. 특히 북한군 참전과 북·러 밀월로 전쟁이 우리 안보에 주는 부정적 여파를 감안하면 임기 막판까지 전쟁을 밀어붙이는 조 바이든보다는 끌낼 의향을 가진 트럼프가 어떤 면에선 더 유익하다.

매일경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가족사진에 등장한 머스크. [트럼프 손녀 X 캡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트럼프는 ‘중국만 아니면 무엇이든’이라는 일명 ‘ABC(Anything but China)’ 원칙을 우크라이나에서도 보여줬다. 중국과 관련 없이 돈만 되면 뭐든 한다는 것이다. 트럼프 1기 때 우크라이나 정부가 군 현대화 작업을 벌이자 트럼프가 무기 판매에 열을 올린 것도 그런 맥락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의 친밀을 과시하면서도 러시아를 공격할 무기들을 우크라이나에 제공했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초반 활약한 ‘재블린(Javelin)’ 대전차 미사일이 대표적이다. 어깨에 메고 쏘는 소형 미사일이지만 러시아 전차들을 대거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반면 러시아와 협력은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크렘린의 미국 대선 개입 의혹으로 미국 의회가 제동을 건 점도 있지만 트럼프의 조치들이 푸틴을 섭섭하게 한 일도 많았다. 러시아와 맺은 중거리핵전력(INF) 조약을 2019년 일방 파기했고, 핵무기 감축을 위한 신전략무기감축협정(뉴스타트) 연장 거부, 공중정찰을 위한 항공자유화조약(OST) 탈퇴도 선언했다. 유럽에서 러시아의 에너지 영향력 확대를 우려해 ‘노드스트림’ 건설을 반대하며 압박한 것도 트럼프였다. 미·러 정상 간 단독회담은 2018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단 한번 있었다. 어쩌면 트럼프 ‘거래의 기술’이 어느 한쪽에 일관되게 치우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다는 방증이다.

매일경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이른바 ‘천국 백인’(Heavenly Hundred) 기념물 앞에서 묵념하고 있다. 이 기념물은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진행된 대규모 친 유럽연합(EU) 시위 도중 사망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공보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얼마 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우크라이나가 사업적 제안들을 통해 트럼프 흔들기에 나섰다고 전했다. 트럼프와 가까운 린지 그레이엄 공화당 상원의원은 우크라이나의 주요 천연자원을 공유하는 방안을 내놨다고 한다. 또 통신 등 우크라이나 산업에서 높은 중국 의존도를 낮추려 미국 업체들로 전환하고, 서방에 수익성 높은 투자 기회를 준다는 복안도 있다고 한다. FT에 따르면 젤렌스키는 이미 지난 9월 미국에서 트럼프를 만나 이런 제안들을 전달했다.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트럼프 집권 1기를 경험해본 많은 나라들이 저마다 대비책들을 세우고 있는 중이다. 각국의 비상한 대응 노력들이 더해져 트럼프가 앞으로 어디로 튈지 예단하기는 더 힘들어졌다.

우리나라는 트럼프 집권 2기에 관세 인상 등 보호무역기조 강화나 주한미군 주둔 비용 분담 등 숙제가 많다. 더 큰 이익을 위해 상대의 요구 일부는 들어주는 용단도 필요하다. 이달 초 합의된 2026년 방위비 분담을 놓고 혹시 있을 추후 협상에서 다소 올려줘야 한다면 반대급부를 세밀히 챙기면 된다. 미 해군 함정의 유지·보수·정비(MRO) 시장 규모가 연 20조원이라는데 MRO 수주를 방위비 인상액 그 이상으로 따내는 거래를 해볼 수도 있다.

일각에서는 전술핵 재배치나 제한적 핵무장도 주장하지만 최근 러시아의 핵위협으로 각국의 핵 보유 유혹이 커지는 마당에 당장 쉽지는 않다. 한미 원자력협정을 개정해 일본처럼 핵연료 재처리를 통한 플루토늄 생산·비축을 용인받는 방법도 있다.

매일경제

1998년 대우조선해양 방문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 (서울=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대선 승리 직후 한국과 조선업 협력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트럼프 당선인(가운데)이 지난 1998년 6월 경남 거제 대우중공업(현 한화오션) 옥포조선소를 방문해 선박 건조를 둘러보는 모습. 왼쪽은 장남인 트럼프 주니어. 2024.11.8 [대우조선해양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photo@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트럼프가 조선 분야에서 한국의 협조를 구한 것은 자동차·반도체 외에 한미 협력의 확대 측면에서 고무적이다. 또 해양세력 주축인 미국의 선박 건조·MRO 시장에 우리가 뛰어드는 것은 육상·해상세력 사이에서 반도국의 위상 증대라는 문명사적 의미도 있다.

다가올 트럼프 시대에는 기존에 없던 상상력을 발휘하는 게 절실하다. 우리도 유연한 사고와 장기간 축적된 나름의 ‘거래의 기술’을 바탕으로 트럼프 시대를 대비해가야 한다.

김병호 논설위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