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베이징 자금성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이 트럼프 대통령 부부에게 칭찬하듯 엄지손가락을 올려 보이고 있다. 시 주석은 자금성에서 ‘황제 의전’으로 트럼프 대통령과의 관계를 강화하려 했다. 베이징/AP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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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무비자 입국 대상 국가에 포함시켰다는 중국 외교부 대변인 명의의 발표는 지난 1일 심야에 비밀작전처럼 나왔다. “주중 한국대사관의 영사 담당자들도 전혀 모르고 있다가 당황해 심야에 대책회의를 여는 등 분주했다.” 내막을 잘 알고 있는 외교 소식통의 얘기다. 이 결정이 중국 외교부 실무자들이 아닌 최고 지도부에서 나온 전략적 결정이라는 뜻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재대결을 예상한 중국은 올해 초부터 철저한 준비를 해왔다. 동남아시아와 남미, 아프리카 등 글로벌 사우스에서 중국의 시장과 공급망, 영향력을 확대했고, 유럽, 호주, 뉴질랜드, 한국, 일본 등 미국 동맹국들과의 관계를 개선했다. 트럼프의 대중국 ‘관세 폭탄’과 디커플링 공세에 맞설 우군을 늘리며 만리장성을 쌓아온 것이다. 한국에 대한 무비자 조치는 그 일환이었다.
예상대로,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하고 ‘반중 강경파’들을 전면에 내세우자 중국에선 불안과 기대가 교차하고 있다. 신장위구르·홍콩 문제 등에서 중국을 강하게 비판했다가 중국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는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이 국무장관 자리를 예약했고, ‘베이징 동계올림픽 전면 보이콧’을 주장했던 마이클 왈츠는 국가안보보좌관에 내정됐다. 미국 정부의 무역 정책을 총괄하는 ‘무역 차르’로 돌아올 것으로 알려진 로버트 라이트하이저는 중국 상품에 60% 이상 폭탄 관세 부과를 준비 중이다.
트럼프 당선은 미국이 더 이상 비용을 들여 국제질서를 유지하지 않겠다는 고립주의를 상징하지만, 그 내부에는 복잡한 이해관계와 주장이 경쟁하고 있다. 트럼프 자신이 ‘강력한 지도자 시진핑을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중국이 미국의 일자리를 훔쳐가고 있다며 60% 관세 폭탄을 예고하는 등 모순적인 ‘두 얼굴의 트럼프’가 공존한다. 그의 측근들도 우크라이나와 중동에 군사력과 돈을 낭비하지 말고 중국 압박에 집중하자는 이들부터, 중국공산당과는 공존할 수 없다는 세력, 중국과의 타협을 공공연히 주장하는 일론 머스크까지 다양하다. 트럼프는 때로는 강경파들을 앞세우고, 때로는 타협파들을 앞세우면서,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하게 중국과 협상에 나설 수 있다. 이 불확실성이 중국을 불안하게 하지만, 트럼프의 거칠고 혼란스러운 정책이 미국의 분열과 쇠퇴를 더욱 가속화할 것이라는 중국의 기대도 높아지고 있다.
상하이의 한 외교 전문가는 “우리는 매일 ‘백년 만의 대전환’이 현실이 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고 했다. ‘백년 만의 대전환’은 20세기 초 이래 계속된 서구 주도 국제질서가 쇠퇴하고 중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제창한 중요 이념이다. 트럼프가 내각에 기용하는 문제 많은 인물들을 보면서, 미국 주도 국제질서가 분명하게 막을 내리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트럼프가 중국에 단기적으로 나쁘지만, 장기적으로는 좋다’는 판단을 많은 중국 전문가들이 내놓고 있다.
후웨이 전 상하이시공산당당교 교수는 지난 7일 ‘트럼프 집권이 중국에 유리한 다섯가지’라는 글을 중국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인 위챗에 올렸다. “첫째, 트럼프는 민주와 독재를 구분하지 않으므로 ‘독재’라는 이유로 중국을 고립시키지 못한다. 둘째, 미국의 분열은 악화되고 미국 민주 제도는 위협받는다. 셋째, 동맹국들과 균열이 일어나 미국의 리더십이 약화되면서 중국에는 큰 공간이 열린다. 넷째,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에 유리해지지만, 미국 강경파들이 주장하는 ‘미-러가 연합해 중국에 대항하는’ 국면은 오지 않을 것이다. 다섯째, 트럼프는 대만 문제를 두고 중국과 거래할 수 있다. 중국은 마침내 대만을 통일할 것이다.” 결국, 트럼프 시대 미국의 후퇴와 자중지란, 동맹의 약화, 대만 문제에서 거래 가능성이 중국에 승리의 공간을 열어준다는 뜻이다. 후웨이는 “트럼프는 상인이고 거래할 수 있으며 이익을 보면 도의는 잊는다(見利忘義)”고 강조했다.
지난해 11월 미국을 방문한 시진핑 국가주석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연 기업가 만찬에서 일론 머스크와 악수하고 있다. 머스크는 이 사진을 자신의 X 계정에 올려 시 주석과의 관계를 과시했다. X 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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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선거운동에 1억3천만달러를 ‘투자’한 억만장자 기업가 일론 머스크의 역할에 대한 기대도 중국 내에서 당연히 높다. 중국 당국은 그동안 시진핑 주석, 리창 총리 등이 직접 머스크를 만나면서 공을 들여왔다. 특히 머스크가 올해 4월 베이징을 방문해 리창 총리를 만나고 돌아간 뒤, 트럼프가 ‘중국 전기차 회사가 미국에서 자동차를 생산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중국 지도자들은 머스크가 트럼프로 향하는 통로임을 알아차렸다. 중국은 얼마 뒤 테슬라 차량에 대한 데이터 보안 규제를 면제했다. ‘친중파’임을 자처하며 대만이 중국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해온 머스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중국의 트로이 목마가 될 수 있다.
대만 문제는 ‘발화점’이 될 수도, ‘타협점’이 될 수도 있다. 트럼프 정부 내 강경파들은 중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대만해협에서 전쟁도 불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트럼프가 무역전쟁이나 기술 봉쇄 카드로 중국에서 양보를 이끌어내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할 경우, 대만을 중국 압박 카드로 사용할 수 있다. 반면, 트럼프는 대만이 안보 비용을 제대로 내지 않고 “미국의 반도체 산업을 빼앗아 갔다”며, 대만을 방어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트럼프가 중국으로부터 대규모 경제적 이익을 받아내는 대신 대만 방어를 포기한다면 동아시아는 물론 전세계의 질서에 격변이 일어난다.
딩쉐량 홍콩과기대 명예교수는 웨이신 공식 계정에 올린 글에서 “트럼프가 한국과 일본에 주둔하는 미군의 절반을 감축하고, 필리핀에서 미군 기지 확대를 중단한다면 미국이 전략적 요충지에서 무력을 투사할 수 있는 능력은 크게 약화할 것이다. 트럼프가 또다시 대만해협은 미국의 핵심이익이 아니고 미군이 이 지역의 무장 충돌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명확히 밝히면, 1945년 이후 동아시아의 ‘화약고’ 지역에서 유지되어온 질서에 연쇄 반응을 일으키고(…) 서방 세계가 강조해온 국제질서는 역사박물관 속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가 동맹들을 압박하고 채찍을 휘두를수록 이들이 미국으로부터 멀어지고 중국에 가까워지면서 미국의 글로벌 동맹 시스템이 약화된다는 것도 중국에 중요한 기회 요인이다. ‘한미일 군사협력’에 올인해온 한국 윤석열 정부도 트럼프 승리 이후 ‘중국 역할론’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유럽 국가들도 트럼프의 고립주의에 좌절하면서 중국 쪽으로 다가설 것이다. 중국이 한국, 일본, 유럽 국가들과 의미 있는 경제·안보적 접점을 확대해 간다면 국제질서는 변곡점을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 넘어서야 할 중요한 관문이 있다. 트럼프가 집권하자마자 시작될 관세 폭탄과 최혜국대우 철폐 등 무역전쟁이다. 2018년 트럼프가 대중국 무역전쟁에 돌입했을 때와 달리 중국이 철저한 준비를 했고 약점을 보완하고 반격 무기를 갖춘 것은 분명하다. 시진핑 주석은 미국과 서구의 압박에도 버틸 수 있는 경제를 만들기 위해 첨단기술을 비롯한 핵심 영역에서 미국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자급자족을 달성하려는 전략을 추진해왔다. 이 전략의 핵심인 인공지능, 로봇공학, 반도체, 전기차, 태양광 등에서 대약진이 일어나고 있다.
문제는 극과 극에 있다. 첨단 제조업과 국유기업은 승승장구하지만, 민생 경제의 어려움은 깊어지면서 분노와 불안이 임계점에 다다른 듯 폭발하고 있다. 지난 9월부터는 상하이의 대형마트, 베이징과 후난성의 초등학교, 광둥성 주하이의 체육시설, 장쑤성 우시의 직업학교 등에서 무차별 칼부림과 차량 돌진으로 수십명씩 사상자가 나오는 ‘사회 보복 사건’이 잇따르면서 중국 사회가 술렁인다. 장쑤성 우시의 직업학교에서 무차별 칼부림 사건을 벌인 21살 졸업생이 “노동자들은 죽기 살기로 2교대, 3교대를 하며 매일 16시간을 일해도 공장은 임금을 체불하고 벌금을 물리고 있다”며 “나는 죽어도 다시는 착취 당하고 싶지 않고, 나의 죽음으로 노동법의 진보가 추동되기를 희망한다”고 절규했다는 ‘유서’가 인터넷에서 확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의 갈등과 무역전쟁이 깊어진다면 중국 사회가 버텨낼 수 있을까. 중국의 한 학자는 “지금 중국은 미국과의 전쟁, 미국의 봉쇄와 제재도 그리 두려워하지 않는다. 중국 제조업은 전 분야를 아우르는 능력을 갖추고 있고 내순환(자급자족)할 수 있다. 우리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것은 ‘내란’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에서 소외된 이들의 분노가 트럼프와 고립주의를 불러냈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 눈앞에 왔다는 기대에 부푼 중국에서 소외된 이들의 분노는 어떤 변화를 일으킬까.
박민희 |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대학과 대학원에서 중국과 중앙아시아 역사를 공부했다. 2007~2008년 중국 인민대학교에서 국제관계를 공부한 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한겨레 베이징 특파원으로 중국 곳곳을 다니며 취재했다. 통일외교팀장, 국제부장, 논설위원을 거쳐 세계와 외교에 대해 취재하고 쓰고 있다. ‘중국 딜레마’ ‘중국을 인터뷰하다’(공저)를 썼고, ‘보이지 않는 중국’ ‘롱게임’ 등의 책을 번역했다.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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