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워런 버핏 일가의 전통인 '추수감사절 기부'가 이어졌다. 그런데 이 기부에는 묘한 구석이 있다. 아버지가 세 자녀에게 돈을 주는데 '기부'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워런 버핏의 수상한 연례 기부행사를 자세히 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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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전 유언=25일(현지시간) 워런 버핏이 11억5000만 달러를 또 기부했다. 전세계의 기부 소식을 전하는 격주간지 '크로니클 오브 필란스로피(chronicle of philanthropy)'는 "워런 버핏이 추수감사절의 기부 전통을 이어갔다"고 보도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버핏은 이번 기부를 통해서 세상의 모든 부모에게 자산 증여 계획의 방법을 알려줬다"고 극찬했다.
워런 버핏은 이날 기부 소식과 함께 발표한 메시지에서 부모들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했다. "자녀들이 다 자라면, 유언장에 서명하기 전에 내용을 읽게 하라." 유언장 얘기는 왜 나왔을까. 워런 버핏이 주식을 기부한 곳이 전처 이름을 딴 재단 1곳과 세 자녀가 각각 보유한 3개 재단이기 때문이다.
버핏은 자신이 소유한 버크셔 해서웨이 클래스 A주식 1600주를 클래스B 주식 240만주로 교환한 다음, 수잔 톰슨 버핏 재단에 150만주, 세 자녀인 수지·하워드·피터 버핏이 운영하는 재단 3곳에 각각 30만주를 기부했다.
워런 버핏 일가의 재산이 가진 특성 때문에 버핏은 2006년 이후 항상 이렇게 복잡한 방식으로 생전 증여 및 사후 상속 과정을 밟고 있다. 버핏 일가 재산은 '막대한 부富'라는 단 하나의 특징을 가졌다.
버핏은 이번 기부 소식을 전하며 세 자녀에게 보내는 당부의 말도 빼놓지 않았다. "(기부한 지분은)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들이 찰스 토머스 멍거와 내게 베풀었던 특별한 신뢰를 절대로 저버리지 않는 방식으로, 점진적으로 나뉘어야 한다." 찰스 토머스 멍거는 버크셔 해서웨이의 부회장이자 버핏의 최측근이었다. 지난해 11월 사망했다.
■ 핵심은 절세=워런 버핏이 세 자녀에게 당부한 이 말은 제법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평생 버크셔의 모든 주주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냈던 워런 버핏의 마음 씀씀이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워런 버핏이 생전 유언장 의미로 작성해 2010년 공개한 '자선 서약서'에도 막대한 부에 맞서 절제하려는 태도를 느낄 수 있다.
버핏은 서약서에서 "나와 빌 게이츠는 수백 명의 부유한 미국인들에게 전 재산의 최소 50%를 자선단체에 기부해달라고 요청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나의 부는 미국에서의 인생, 행운의 유전자, 복리가 결합한 결과입니다. 나와 가족들은 이런 특별한 행운 앞에서 죄책감보다는 고마움을 느낍니다."
[자료 | 세룰리 어소시에이츠. 참고 | 기간 2025~204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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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한 부 앞에서도 절제를 잃지 않는 전설적인 투자자다운 소감이지만, 반전이 있다. 버핏식 기부의 핵심은 절세라는 점이다. 워런 버핏이 올해 11억500만 달러를 세 자녀에게 사실상 증여하면서 세금을 얼마나 아꼈는지를 보면 모든 주주를 향한 넘치는 그의 사랑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버핏의 세 자녀가 절세한 증여세는 얼마나 될까. 세 자녀가 재단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돈을 받았다면, 미국 증여세(estate & gift tax) 공제한도 1만9000달러를 제외한 금액에 최고세율 40%를 적용한 증여세 4억5848만7760달러를 내야 했다.
버핏은 올해에도 '추수감사절의 기부'라는 가족 전통을 이어간 결과, 세금 7억3129억2499달러(약 1조164억9657억3610만원)를 아꼈다. 3년이면 3조원, 5년이면 5조원, 10년이면 10조원을 아낀다. 2006년 이후 이어진 버핏 일가의 기부 전통으로 지금까지 이들이 내지 않은 세금은 18조원 이상이다.
실제로 워런 버핏은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들에게 배당금을 지급하지 않아 배당 소득세를 내지 않았고, 주식을 장기 보유해 이익 실현 과세를 피했고, 자산 대부분을 자선단체에 기부해 전액 공제받았으며, 이렇게 형성된 막대한 부를 과세 없이 자녀에게 대물림했다. 워런 버핏이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들을 보물처럼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소득세에서 재산세로=국제 금융계는 2025~2045년을 '부富의 대이동' 시대라고 부른다. 세룰리 어소시에이츠(Cerulli Associates)는 지난 6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향후 20년간 전세계에서 상속과 기부로 84조 달러(약 11조6700조원)가 대물림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중 자산 상위 1.5%가 다음 세대로 대물림하는 금액은 35조8000억 달러에 달한다.
그런데, 이렇게 막대한 부가 버핏식 절세를 통해 분배되지 않고 그대로 세대를 이동하면 현재 최고조에 다다른 전세계적 경제적 불평등이 한계점에 도달할 수도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의장을 역임한 재닛 옐런 재무부 장관은 2019년 "미국의 불평등은 대공황 이후 40년 동안 완화했지만, 최근엔 19세기 이후 가장 심각한 지표를 보인다"며 "결과의 불평등은 기회의 불평등을 악화시키는 방식으로 전체 경제적 불평등을 영속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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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소득이 아닌 자산에 국제적인 세금을 부과하자는 주장이 나온 것도 이런 불평등이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를 뒤흔들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다. 프랑스 경제학자 가브리엘 주크만 UC 버클리 경제학과 교수는 지난 6월 25일 올해 G20 의장국인 브라질이 의뢰해 작성한 초부자세 관련 보고서에서 "순자산 1억 달러 이상인 초부자(초고액자산가·Ultra high net worth) 3000여명의 부동산‧주식‧암호화폐‧금 등 모든 종류의 자산 가치의 2%를 매년 부유세(wealth tax)로 걷자"고 주장했다.
도널드 트럼프에 패배한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대선후보도 초부유층이 보유한 주식을 장기간 보유해 과세를 회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미실현 자본소득에 과세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영국 런던정치경제대학(LSE)도 지난 9월 학술 블로그에 "한국과 노르웨이처럼 영국 상속세도 재산이 많을수록 실효세율이 상승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경제적 불평등 심화를 저지하기 위해 과세의 초점을 소득세에서 재산세로 이동시키려는 움직임은 이제 막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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