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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1 (일)

[팩트체크] 반도체특별법, 비교해보니…미·일 법률로 촘촘, 한국은 정부 입맛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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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8일 오후 경기 평택 삼성전자 평택사업장에서 열린 ‘반도체협회 초청 간담회’에서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 등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고용노동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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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산업이 위기라는 이유로 정부와 여당이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및 혁신성장을 위한 특별법’(반도체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해당 법안에는 반도체산업 연구개발 노동자 가운데 일정 수준 이상의 ‘고임금 노동자’에게는 주 52시간 노동상한제와 초과근로수당 지급 규제를 면제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있다. 이로 인한 장시간노동에 따른 건강권 침해 우려가 노동계를 중심으로 제기되는 가운데, 반도체업계와 정부·여당은 일본의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 미국의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제도가 존재하는 만큼, 한국도 도입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맞선다. 28일 한겨레가 일본의 노동기준법·미국의 공정근로기준법을 반도체특별법과 비교해보니, 제도 도입 절차와 적용 대상, 건강보호조처 등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도입절차: 일본 ‘집단동의’ 한국 ‘개별동의’





먼저 여당이 발의한 반도체특별법에는 일정 연봉 이상의 반도체산업의 신상품·신기술 연구개발자가 회사와 ‘개별 서면합의’하면 주 52시간 근로시간 상한이나, 휴게·휴일, 초과근로수당 지급 등에 관한 규제를 적용하지 않을 수 있도록 규정한다. 특정 직종 고소득 노동자에게 근로시간·초과근로수당 규제를 면제하는 일본의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와 비슷하다. 그러나 반도체특별법은 적용제외 노동자의 판단 기준, 도입 절차, 건강보호조처 관련 내용은 법률이 아니라 모두 대통령령으로 위임하도록 하고 있어, 법률이 통과되면 정부 마음대로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이에 반해 한국의 근로기준법과 체계가 유사한 일본의 노동기준법은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와 관련해, 적용 절차와 대상, 대상노동자의 근로자 보호조치 등을 ‘법률’을 통해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해당 제도 도입논의가 이뤄질 당시, 일본에서는 ‘과로사촉진법’이라는 비판이 잇따랐는데, 이 때문에 제도가 보완됐다는 평가가 있다.



먼저 도입 절차와 관련해 일본은 사업장의 근로자대표를 포함한 노동자와 사용자로 구성된 ‘노사공동위원회’ 위원 가운데 5분의 4 이상이 찬성해야 제도를 도입할 수 있고, 개별 노동자의 동의를 추가로 받아야 한다. 사실상 ‘집단동의’에 해당하는 것으로, 회사가 개별노동자와 합의만 하면 제도를 적용할 수 있는 반도체특별법과는 차이가 크다. 현재 한국의 유연근로제 역시 노동자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 또는 노동자 과반수를 대표하는 자(근로자대표)와의 서면합의, 즉 집단동의를 도입 요건으로 두고 있다.







건강보호조처: 일본 ‘법률에 빼곡히’ 한국 ‘통째로 시행령 위임’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를 적용할 수 있는 노동자는 연봉이 시행규칙이 정하는 1075만엔을 넘겨야 한다. 업무의 내용은 “고도의 전문지식 등을 필요로하고 업무 성격이 업무 성과와 업무 시간의 관련성이 높지 않아야” 한다. 이에 더해 시행규칙은 “업무 시간과 관련해 사용자의 구체적인 지시를 받아 수행하는 경우”에는 해당 제도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이는 업무 수행을 노동자 재량에 맡기는 경우 근로시간 규제를 완화하는 한국의 ‘재량근로제’와도 유사하다. 그동안 반도체업계는 “노동자에게 구체적 지시를 할 수 없어 재량근로제를 사용할 수 없다”며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와 유사한 제도의 도입을 요구했지만,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 역시 노동자에게 ‘구체적 지시’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일본은 건강보호조처도 매우 구체적으로 법률에 규정한다. 반도체업계는 주 52시간 규제 준수를 위한 ‘근로시간 관리’ 자체를 소모적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일본은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를 도입하더라도 노동자 건강보호를 위해 근로시간과 사업장 내 체류시간을 더한 시간(건강관리시간)을 측정·기록하고 관리하도록 하고 있다. 건강관리시간 상황에 따라 유급휴가를 주거나, 신체·정신건강 상담, 배치전환 등의 조처를 하도록 한다. 또한 △주 40시간을 초과한 건강관리시간을 1개월에 100시간 또는 3개월에 240시간을 넘지 못하도록 규정 △연차휴가와는 별도의 1년에 연속 2주 이상 휴일 부여 △근로일 사이 11시간 연속휴식 가운데 하나 이상의 조처를 하도록 하고 있다. 1년을 통틀어 104일 이상, 4주를 통틀어 4일 이상의 휴일도 부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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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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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업무: 미국·일본 ‘재량’ 필요





일본의 고도프로페셔널 제도의 원조 격인 미국의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제도는 비교적 단출하다. 미국의 공정근로기준법과 시행령을 보면, 관리직·운영직·전문직 가운데 직종별 테스트 요건을 모두 충족하면서, 주급이 684달러 이상인 경우 주 40시간을 초과한 근로에 대한 1.5배 연장근로수당 지급의무가 없다. 이와 별도로 연봉이 10만7432달러를 초과하는 고액연봉 노동자들은 직종별 테스트 가운데 하나만 충족해도 연장근로수당 지급 의무가 면제된다.



미국의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이 적용되는 직종 가운데 반도체특별법이 규정하는 연구개발직은 ‘전문직’에 해당한다. 공정근로기준법 시행령은 ‘전문직’에 대해 주된 업무가 “고급지식이 필요하고, 주로 지적인 성격이 강하며 재량과 판단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해야 하는 업무”로 규정한다. 여기서 고급지식은 과학·학술 분야에 속하는데, 장기간 전문적인 교육을 통해 습득할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반도체업계에 이를 적용하면, 임금이 일정수준 이상인 고학력 연구직이면서 업무수행에 재량이 있는 노동자에 해당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처럼 노동자의 ‘재량’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반도체 특별법은 이에 관한 구체적 명시 없이 `신상품·신기술' 연구개발 노동자로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미국의 한국·일본과 비교되는 가장 큰 차이는 공정근로기준법상 근로시간 상한 자체가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을 통해서는 사용자의 초과근로수당 지급 의무만 면제된다. 때문에 관련 논의 때도 ‘장시간 노동 우려’는 고려 대상에 오르지 않는다 한다. 그러나 지난해 기준 미국의 연간 근로시간은 1810시간으로, 노동시간 상한 규제가 있는 한국의 1874시간보다도 적다.







진짜 목적은 인건비 절감?





오히려 미국은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도입 배경이 반도체업계가 말하는 ‘업무 효율성’ 등보다는 사용자의 ‘인건비 절감’ 목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초과근로수당을 못 받는 노동자 규모를 줄일 목적으로 지난 4월 시행령을 개정해 고액연봉 노동자 기준을 지난 7월부터는 연봉 13만2964달러, 내년 1월부터는 15만1164달러로 상향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해당 시행령은 지난 15일 텍사스동부지방법원의 판결로 효력이 정지됐고, 미국 정부가 항소해 재판이 진행 중이다.



정영훈 부경대 교수(노동법)는 “일본은 근로시간에 관한 규제를 제외하면서도 도입 절차와 건강보호조처를 매우 구체적으로 법률에 명시하고 있다”며 “근로조건에 관한 내용을 통째로 대통령령에 위임하는 것은 근로조건은 법률로 정해야 한다는 ‘근로조건 법정주의’에 부합하지 않는 부실한 입법”이라고 말했다. 이어 “제도 도입이 필요하다면 노사의 충분한 토론을 바탕으로 근로기준법에 도입하는 것이 맞지, 업종별 특별법에 규정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짚었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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