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내린 이른 아침, 겨울 정원이 아름다운 순간
침엽수 초록색, 잎 떨어진 나무의 빨강·노랑·주황
사계절 끝에 다가온 정원에는 예술적 색감 넘쳐
온실로 만든 英 셰필드 윈터 가든, 美 롱우드 가든
자연과 문화를 함께 느끼는 따뜻한 겨울 공간
국립세종수목원의 겨울 풍경(위·가운데)과 미국 롱우드 가든의 은청가문비나무로 만든 크리스마스 트리(아래). /사진=박원순, 그래픽=이철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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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의 끝에서 겨울 정원은 다른 계절과는 또 다른 차원의 매력으로 다가온다. 겨우살이(미슬토) 아래서 키스를 나누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크리스마스캐럴 단골 가사처럼 겨울 정원은 뭔가 설렘을 자극하는 특별한 시즌과 맞물려 있다. 눈이 소복이 내린 겨울 정원의 아름다움은 꽃이 만발했던 시절의 화려한 정원에서 느낄 수 없는 감동과 영감을 전해준다.
야외 정원에 자리 잡은 구상나무를 비롯한 침엽수들이 특유의 푸른 자태와 질감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시기도 겨울이다. ‘한국 전나무(Korean Fir)’라고 불리는 구상나무는 전 세계 우리나라에만 자생하는 특산 식물로 일찍이 유럽에 소개돼 겨울 시즌을 대표하는 크리스마스트리 품종으로 육성되기도 했다.
늘푸른나무인 침엽수 잎들을 종류별로 자세히 보면 다양한 빛깔의 초록을 즐길 수 있다. 짙은 숲 같은 녹색 소나무도 있고, 신비로운 은빛이 감도는 푸른색 은청가문비나무, 에메랄드빛 초록을 선사하는 서양측백 종류도 있다. 사실 초록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매년 ‘올해의 색상’을 발표하며 글로벌 트렌드를 선도하는 팬톤(Pantone) 컬러는 300가지에 이르는 녹색 계열의 색상을 고유 번호로 지정할 정도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카를 융이 언급했듯이 초록은 마음에 평온함을 주는 색이므로, 겨울에 늘푸른나무의 잎들을 자주 보면 볼수록 정신 건강에도 좋다.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도 아름다운 겨울을 위해 정원에 되도록 많은 종류의 늘푸른나무를 심을 것을 제안했다.
겨울에 잎이 모두 떨어진 줄기 자체가 빨강, 노랑, 주황 같은 강렬한 색깔을 나타내는 나무들도 겨울 정원의 매력을 더한다. 메마른 마음에 생기를 돋워주는 이 나무들은 주로 흰말채나무, 버드나무, 회화나무의 품종들이다. 자작나무를 비롯해 중국복자기, 티베트벚나무, 적피배롱나무 같은 종류는 범상치 않은 나무껍질을 통해 예술적 색감과 질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겨울 정원은 서리가 곱게 내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이 가장 아름답다. 참억새, 수크령, 기장, 새풀 종류처럼 아름답게 시든 꽃이삭과, 큰꿩의비름이나 오이풀처럼 우아하게 마른 씨송이 위로 아침 서리가 내려앉은 풍경은 마치 눈꽃이 핀 듯 찬란하다.
추위로부터 보호된 실내 공간은 겨울에만 볼 수 있는 특별한 꽃과 장식으로 즐겁고 설레는 정원으로 거듭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겨울에도 꽃을 감상할 수 있는 실내 온실을 ‘겨울 정원(Winter Garden)’이라 불렀다. 1616년 프랑스 작가 장 프라노는 ‘겨울 정원 또는 꽃 전시실(Jardin d’hiver ou cabinet des fleurs)’이라는 제목의 책을 통해 꽃이 가득한 겨울 정원의 아름다움을 다채로운 꽃 세밀화와 함께 소개했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대규모 유리온실은 추운 겨울 동안 다양한 이국의 식물들을 감상할 수 있게 해줬다. 이 시기 온실은 단순히 식물을 보호하는 차원을 넘어 겨울철 여가와 사교의 공간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1851년 영국의 조셉 팩스턴이 런던 만국 박람회를 위해 설계한 유리 건축물 크리스털 팰리스(The Crystal Palace)는 겨울 정원의 개념을 전 세계에 대중적으로 알린 대표적인 사례다.
현대의 사례로는 2003년에 개장한 셰필드 윈터 가든(Sheffield Winter Garden)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영국 셰필드 도심에 있는 이 유리온실은 유럽의 도시 온실 가운데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길이 70미터, 높이 21미터에 달하는 온실에는 2000종 이상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포물선을 그리는 곡선형 프레임에 사용된 목재는 유럽잎갈나무 판을 층층이 붙인 집성목으로 뛰어난 내구성을 자랑한다. 지능형 온실 관리 시스템도 갖췄다. 매년 데이터 학습을 통해 스스로 효율성을 높이는 팬과 환풍구 제어로 여름은 시원하게 겨울은 따뜻하게 유지된다. 셰필드의 도시 재생을 상징하는 이 온실은 도시민들과 관광객 모두가 자연과 문화를 함께 즐길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다.
수목원이나 식물원에 만들어진 온실은 특별히 ‘컨서버토리(Conservatory)’라고 부른다. 중요한 식물 자원을 보전하는 장소라는 측면에서 음악, 예술, 문화를 보존하고 가르치는 컨서버토리와 같은 개념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식물원 컨서버토리 중, 미국 롱우드 가든(Longwood Gardens)을 빼놓을 수 없다. 1950년대 후반부터 크리스마스 시즌에 특화된 꽃과 예술적인 전시로 잘 알려져 있다. 설립자 피에르 듀퐁은 크리스마스에 롱우드 가든 직원 가족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었는데, 특히 아이들은 크리스마스트리 주변에 쌓여 있는 선물 상자를 커다란 주머니에 맘껏 담아 가는 기쁨을 누렸다.
롱우드 가든의 국제 정원사 양성 과정에 참여하며 그곳 정원사들과 함께 방문객들을 위해 정성껏 겨울 전시를 준비했던 시간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다. 밤을 새워 가며 꽃을 심고 나무를 옮기고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는 작업이 무척 힘든 일인데도 모두가 마치 산타의 요정들이라도 된 듯 신이 났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곧 수많은 방문객이 찾아와 행복해하는 모습을 생각하며, 소중한 사람들을 위한 파티를 준비하듯 설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몸도 마음도 추운 겨울 동안 서로에게 따뜻한 온기를 전하기에 꽃만 한 것도 없다. 연말이 가기 전, 고마운 사람들을 위해 꽃 선물을 준비해 보는 건 어떨까? 포인세티아나 시클라멘 같은 꽃도 좋고, 이 계절에 어울리는 개성 넘치는 잎을 가진 색다른 반려 식물, 또는 넉줄고사리 같은 우리 자생식물도 좋다. 또는 겨울 정취 가득한 정원이나 온실을 함께 방문하여 서로의 우정과 사랑을 확인하는 추억을 만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사계절의 끝에서 빛과 어둠이 만나는 시간, 고요함 속에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는 겨울 정원은 특히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수록 더 포근하고 사랑스러운 정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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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 국립세종수목원 전시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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