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대전 루스 전투 현장. 참호를 나와 진격하는 영국군들. suburbanmilitarism.wordpres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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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이 겪는 정신적 전투 후유증을 일컫는 ‘셸 쇼크(Shell Shock)’는 1915년 10월 1차대전 서부전선 프랑스 루스(Loos) 전투 직후 생겨난 용어다. 영국군은 독가스까지 사용한 저 전투에서 독일군 방어선을 뚫지 못해 약 6만 명(독일군 2.6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배했다. 참호 속에서 근 2주 동안 이어진 포격을 견뎌야 했던 병사 중 상당수는 아무런 신체적 부상을 입지 않고도 이명과 두통, 현기증, 소음 공포증, 무력감 등을 호소했다.
셸 쇼크란 말을 공식적으로 처음 쓴 건 영국 왕립 육군 의무단 자문 심리학자 찰스 새뮤얼 마이어스(Charles Samuel Myers, 1873~1946)였다. 15년 말 ‘랜싯’에 발표한 논문에서 그는 저 용어와 함께 주요 증상을 소개했고 셸 쇼크로 전선 복귀 명령에 불응, 처벌받게 된 병사들(명령 불복종)을 구명하고자 애썼다. 훗날 그는 셸 쇼크를 경험한 적 없는 군 지휘관과 정치인들을 일깨우려던 자신의 노력을 “절망스러운 투쟁”이었다고 말했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인근 ‘크레이그록하트(Craiglockhart) 전시 병원’은 1차대전 정신적 외상 병사 치료로 유명한 병원이었고, 의사들의 주된 임무 역시 병사들을 치료해 신속히 전장에 복귀시키는 거였다. 저명 정신과 의사 W.H. 리버스(W.H. Rivers)는 하지만 1917년 12월 4일 셸 쇼크의 임상-심리학적 근거와 함께 적극적인 치료의 필요성을 밝힌 ‘전쟁 경험의 억압’이란 논문을 제출했다. 그의 고집 덕에 병원에 입원한 셸 쇼크 병사 중 전장으로 복귀한 환자는 전체의 1/5에 불과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가 1980년 ‘정신질환진단통계편람(DSM)’ 제3판에 등재돼 공식 인정을 받기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저 병증과 더불어 권력과 대중의 의심을 견뎌야 했다. 그리고 다수의 정신의학자가 그들의 고통을 과학으로 대변했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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