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대통령이 1990년 2월 16일 대덕단지 내 한국전자통신연구소 전시실에서 첨단기술 개발품을 둘러보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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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P 방문인가?”
1990년 2월 16일 영하의 날씨 속에 충남 대덕연구단지 한국전자통신연구소(현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주변은 새벽부터 경호가 삼엄했다.
건장한 체격의 청와대 경호실 직원들이 일반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 출입구에는 금속탐지기를 설치, 출입자를 일일이 검색했다. 출입자들은 사전에 배포한 비표를 가슴에 달았다.
이날 오전 9시 50분경 노태우 대통령이 탄 검은색 승용차가 경호 차량의 안내를 받으며 연구소 현관에 도착했다. 이상희 과학기술처 장관과 경상현 한국전자통신연구소장이 노태우 대통령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통령님.”
노 대통령은 곧장 과학기술처 업무보고장인 연구소 회의실로 이동했다.
대통령이 중앙부처 업무보고를 지방에서 받은 일은 극히 이례적이었다. 그동안 중앙부처는 청와대나 해당 부처를 대통령이 방문해서 업무계획을 보고 받았다.
청와대 당시 관계자의 설명.
“6공화국은 중앙부처 업무보고를 가능한 한 업무 관련 현장에서 받는다는 방침을 정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과학기술처 업무보고를 과학기술도시인 대덕단지 내 한국전자통신연구소에서 받기로 했습니다. 기존과 다른 새로운 보고 방식이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이 보고장으로 입장해서 직사각형 탁자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노 대통령 왼쪽에는 조순 경제부총리, 오른쪽에는 과학기술처 이상희 장관과 최영환 차관 등이 자리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과학기술처 업무계획을 보고 받고 “경제 난국을 극복하고 선진국으로 진입하느냐 주저앉느냐의 관건은 과학기술 진흥에 달려 있다”며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우리가 독자적인 기술 개발 능력을 스스로 기르지 않으면 국제 경쟁 사회에서 버틸 수 없게 될 것”이라면서 “장기적으로 과학기술 인력 양성 계획을 수립해서 추진하고 해외 첨단 과학기술자를 유치하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당부했다.
이날 과학기술처 업무보고 내용과 방식이 과거와 크게 달랐다. 과학기술처는 부처별 벽을 넘어 범부처 첨단기술 개발협력체제를 구축해서 첨단 기술을 개발하고, 수질 정화와 서민주택 보급 기술 개발 등 복지 기술을 중점 개발하겠다고 보고했다. 과학기술 복지화와 범부처 협력체제 구축은 과학기술 정책 발상의 파격이란 호평을 받았다.
이상희 장관은 이날 업무보고를 통해 “정부는 1993년까지 과학관측위성을 발사해서 자원탐사와 대기분석 등에 활용하고 64M D램 반도체를 개발하며, 1996년까지 초등학생 수준의 지능형 컴퓨터를 개발하는 등 우리 과학기술을 10년 안에 선진 7개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보고했다.
이 장관은 “올해를 '기술개발의 원년'으로 정하고 올해 총 1194억원의 연구비를 투입해 첨단기술, 복지기술, 기초과학을 중점 개발해 21세기에 대비한 과학기술의 선진화를 이룩하겠다”고 강조했다.
이 장관은 “범부처 연구개발체제를 구축해 체신부와는 정보산업, 문교부와는 기초과학, 국방부와는 신소재 항공우주, 상공부와는 메카트로닉스, 동자부와는 원자력, 환경처와는 환경오염, 건설부와는 주택보급기술 등을 공동 개발해 나가겠다”면서 “1996년까지 7개년 사업으로 정부산업, 메카트로닉스, 신소재 정밀화학, 생명공학, 항공우주, 원자력 등 7대 중점 분야 60개 국책연구과제를 개발하겠다”고 밝혔다.
이 장관은 “선진국의 기술보호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국제협동 연구체제를 확립하고 소련 등 북방 국가들과 과학기술 교류를 다변화해 나가겠다”면서 “산업 고도화에 따른 첨단기술 인력 확보를 위해 해외 과학자의 대거 초정과 자연계 대학의 정원 확충, 경제난국 극복을 위해 설치한 민간기술의 기술개발반을 적극 지원해 나가겠다”고 보고했다.
노 대통령은 업무보고가 끝난 뒤 이상희 장관, 경상현 한국전자통신연구소장, 박원희 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KIST) 등의 안내로 연구소 1층 전시실에서 관련 부처 연구소가 개발한 경수로 핵연료와 태양전지를 이용한 낙도 전원(電源) 개발, 항공재 연구개발, 종합정보통신망 등 우리 과학자들이 개발한 첨단연구개발품을 살펴보고 연구진의 노고를 치하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연구소 별관 1층에 마련한 오찬장에서 연구원, 산하단체장, 민간연구소 관계자, 대학교수, 학생 등 70여명과 곰탕으로 점심을 함께하며 과학기술계의 진솔한 의견을 가감없이 들었다.
이상희 장관의 회고.
“노 대통령은 여러 사람의 의견을 종합하는 참모형 대통령이었습니다. 대단히 합리적이고 창의적인 대통령이라 생각합니다.”
이날 과학기술처가 보고한 주요 업무 내용은 다음과 같다.
◇7·7 프로젝트
과학기술을 선진 7개국(G7)과 대등한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7대 중점 연구개발 사업을 범부처 사업으로 추진한다.
△정보산업=1993년까지는 미·일 수준인 64M D램을 개발한다. 1996년까지 초등학생 두뇌 수준의 인공지능형 컴퓨터를 개발한다.
△메가트로닉스=통합생산자동화(CIM) 기술 개발로 고임금시대에 대비한 생산성을 향상시킨다.
△신소재=1993년까지 제트엔진 부품의 50% 국산화를 위한 신금속재료, 첨단고분자재료, 정밀요업재료 등 3대 소재를 개발한다.
△정밀화학=2001년까지 의약품·농약 등 30종 이상의 신물질 창출과 염료·도료·첨가제 등 신기능성 물질을 개발하며, 정밀화학 비중을 현재의 27%에서 1993년까지 50%로 확대한다.
△생명공학=1996년까지 600억원을 투자해서 유전공학·단백질공학·세포융합·미생물 이용기술 등 핵심 기술을 집중 개발하고, 각종 시약·예방약·치료제·항생제·백신을 개발한다.
△항공·우주=항공 분야를 차세대 주력산업으로 발전시키며 1993년까지 페가수스급 위성발사 로켓을 제작해서 발사하며, 국토 여건에 맞는 저소음 단거리 수직 이착륙기를 개발함과 동시에 방송·통신 위성과는 별도로 1993년까지 과학 관측 위성을 제작·발사할 계획이다.
△원자력=1990년대 말까지 원전기술 자립을 위한 한국형 원자로를 개발하고, 2000년대 초반에는 차세대 원자로인 고속증식로를 실용화한다.
◇기초과학 진흥
△우수연구집단=대학의 기초연구 활성화를 위해 우수연구집단을 주요 지역별로 지정해서 국제 수준의 연구센터로 육성한다.
◇복지기술 개발
△수질 정화기술=팔당·소양·대청댐 등 3개 지역의 음용 수질오염원 정화기술을 환경처와 공동으로 개발한다.
△보건·의료기술=간염, 당뇨, 암 등 만성 성인병과 직업병 치료제를 개발한다. 원자력병원을 성인병 예방·치료를 위한 핵의학연구센터로 개편한다.
△주택기술=건설기술연구원·주공연구소·과학기술연구원·동력자원연구소 등으로 주택기술개발단을 설치하고 고층화에 대비한 가볍고 강도 높은 주택재료, 에너지절약형 설비, 저가고효율 난방시스템, 표준규격화 생산기술, 시공 자동화 기술 등을 개발한다.
△교통분야=현재의 신호기 중심 국지적 신호 처리에서 도시 전체를 종합 관리하는 자동신호처리시스템을 개발, 차량 평균 속도를 20% 정도 향상시킬 계획이다.
◇국제 공동연구
선진기술 장벽 돌파와 국내 기술개발 능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국제공동연구를 추진한다.
△과학외교=1988년에 실효된 한·미 과학기술협력협정을 올해 안에 다시 체결하고, 오는 3·6·7월 영국·프랑스·서독과의 과학장관 회담을 잇달아 개최한다. 해외 주재 과학관을 현재의 4개국 4명에서 10개국 13명으로 늘린다. 한·소 과학장관회담을 추진하고 오는 6월 서울에서 열리는 국내외 한국인 과학자기술자 종합학술대회에 북한 과학자 참가를 제의할 방침이다.
△해외 첨단연구단지 진출=해외 첨단연구단지의 최신 심층 기술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 연구소 분소 형태의 기지건설을 추진하고 올해 프랑스의 소피아 앙티폴리스,미국 뉴저지와 실리콘밸리, 서독(독일) 아헨, 일본 쓰쿠바 등 5곳에 설치할 방침이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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