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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3 (금)

‘붓다의 언덕’에서 만난 안도 다다오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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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일본 홋카이도에 있는 안도 다다오의 ‘붓다의 언덕’.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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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2023) 여름 어느 날 강원도 원주의 오크밸리 리조트 안에 있는 ‘뮤지엄 산’을 찾았다. 개관 10주년 기념으로 열린 일본 출신의 유명 건축가 안도 다다오(1941~) 특별전 관람을 위해 일부러 갔었다. 강원도를 오가는 길에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면 ‘그냥’ 훌쩍 들르는 곳이라 나름 익숙한 곳이기도 하다.





안도 다다오는 공업고등학교 졸업 학력과 아마추어 권투선수, 트럭 운전수 이력을 가진 건축계의 이단아로 알려져 있다. 그는 우연히 헌책방에서 근대건축의 아버지로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1887~1965·스위스 출신, 프랑스에서 활동) 작품집을 접하고서 ‘내가 할 일은 이것이다’라는 영적인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그 시절 가난했던 청춘은 당장 그 책을 구입할 만큼의 돈이 수중에 없었다. 그래서 혹여 다른 이에게 팔릴까봐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한쪽 구석에 감추어 두었다. 한달 후에 다시 와서야 비로소 그 책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건축기행과 독학으로 건축학을 공부했다. 1969년 건축사무소를 낸 후 80살을 훨씬 넘긴 현재까지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했다. 비록 만나지는 못했지만 이미 돌아가신 코르뷔지에를 정신적 스승으로 삼고서 정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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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원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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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출 콘크리트 기법은 그의 아이콘이다. 그동안 회색 콘크리트는 건물의 골격 역할만 부여되었으며 겉은 마감재로 가려야 하는 대상이었다. 이를 밖으로 과감하게 드러내면서 많은 공정을 줄일 수 있는 혁명적 발상이 대중의 각광을 받으면서 현대건축의 흐름까지 바꾸었다. 기존 건축이론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만약 붕어빵처럼 찍어내는 기존 교육의 틀에 편입되었다면 그의 천재적 창작성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소멸되면서 그저 그런 주변 어디서나 흔히 만날 수 있는 건축가로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팔순이 넘었지만 목표가 있으면 영원히 청춘이라는 그의 끝없는 도전정신은 ‘뮤지엄 산’ 입구에 놓아 둔 3m 높이의 푸른 사과가 대변했다. 그가 만든 건물 안에서 그의 건축 생애를 한눈에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 가운데 ‘삘’이 꽂혀 한동안 발길을 옮기지 못하도록 붙들어 맨 곳은 ‘붓다의 언덕’(Hill of the buddha)이란 작품이었다. 사진이나 스케치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실물을 꼭 친견하려 가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올해(2024) 늦은 가을 11월 중순 일본 홋카이도에 있는 ‘붓다의 언덕’을 찾았다. 1여년 만에 약속을 지킨 셈이니 나로서는 대단히 빠른 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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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수십만평 넓은 부지는 공원묘지였다. 입구에는 칠레 이스터섬에 있는 모아이 석상을 세웠고 한켠에는 영국 솔즈베리 평원의 스톤헨지까지 재현했다. 공원은 1980년대 조성했다고 한다. 30주년 기념사업으로 안도 다다오에게 혼자 덩그러니 외롭게 앉아있는 높이 13m 무게 1천t이 넘는 거대한 불상의 주변을 장엄할 수 있는 작품을 의뢰했다. 아무 것도 없는 공간에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과 기존 조형물을 살리는 선에서 뭔가 추가적인 작업을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일거리가 덜어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더 늘어나는 지난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이것저것 실험을 거듭한 흔적을 ‘뮤지엄 산’에서 스케치로 이미 보았다.





그 결과물로 탄생한 것이 ‘붓다의 언덕’이다. 완만하게 만든 인공 경사지 중앙에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불상의 머리만 보인다. 그 언덕에는 봄이면 파릇한 신록으로 덮히고, 여름에는 라벤더 꽃이 보랏빛 카펫을 만들며, 겨울에는 하얀 눈이 이불처럼 내려앉는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만난 늦가을 언덕은 말라가는 잎들만 바랜 빛으로 겨우겨우 남아있는 그저 그런 밋밋한 풍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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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과 바람을 건물 안으로 끌어들이는 그의 건축관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하지만 입구의 좁고 길면서 얕은 못은 이미 물을 빼버린 맨 바닥이었다. 수리 중인지라 그 묘미를 제대로 살리진 못했지만 그 광경을 상상으로나마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물의 정원을 반 바퀴 돌고 난 뒤에야 참배길로 들어갈 수 있었다. 노출 콘크리트의 이중 담장으로 가려놓은 것은 산악형 절집의 입구에 있는 돌로 만든 축대를 연상케 했다. 곧 40m 길이의 완만한 아치형 터널이 나왔다. 누각 밑을 통과한 뒤에야 절집 마당이 나오는 양식을 그대로 차용했다. 속세와 불계(佛界)를 이어주는 통로인 셈이다. 발자국 소리를 증폭시켜주는 울림을 귀로 들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니 무릎만 보이던 불상이 차츰차츰 몸 전체를 조금씩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한다. 덕분에 압도당하지 않는 친근한 불상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노출 콘크리트를 이용하여 60도 각도로 세운 벽은 기둥 한개 한개를 요철 배치하면서 오목함과 볼록함이 서로 겹쳐지도록 했다. 가운데는 뻥 뚫린 지붕 없는 돔 양식으로 만들었다. 달이 뜨는 날은 법당 안으로 달빛이 쏟아질 것이며, 바람이 부는 날은 그대로 바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으며, 비가 오는 날은 빗소리를 들을 수 있고, 눈 내리는 날에는 불두와 어깨 그리고 무릎에 흰 눈이 소복소복 쌓이도록 하여 노천불상의 원래 의미도 그대로 살렸다. 하늘을 배경으로 앉아있는 잘생긴 부처님 얼굴을 보면서 내는 염불 소리는 에코가 되면서 즉시 실내 음악당으로 바뀌었다. 실내 기능과 실외 풍광을 동시에 만족시킨 건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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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집이라고 하는 것은 비와 바람을 막고 햇빛을 차단하기 위한 용도로 지어졌다. 또 보온과 안전을 위하여 문의 크기는 최소화했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단열 기술이 발달하면서 창문의 크기는 넓어졌고 자연채광을 통해 실내를 환하게 만드는 것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바깥의 바람 그리고 눈·비와 단절되면서 완전히 자연과 격리된 공간에 대한 심리적 불만층도 늘어갔다. 뺨에는 바람이 스쳐가고 마당에는 눈이 쌓이고 처마에는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를 그리워하는 자연주의자들을 위한 집들도 등장했다. 가정집에는 이를 실현하기 어렵지만 안도 다다오는 공공건물에 빛과 바람과 눈비를 건물 안으로 끌어들인 건축계의 선구자로 불린다.





원철 스님(불교사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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