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평생 AS’ 티티경인 김원래 주임 인터뷰
김원래 주임이 경기도 이천 사무실에서 수리 중인 ‘하이샤파’ 연필깎이를 들어보이고 있다. 책상에는 드라이버, 펜치, 커터칼 등 장비가 단출했다./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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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를 초월해 많은 사람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킨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서울올림픽 언저리 평범한 서울 사람들의 생활상과 정서를 실감나게 고증해 인기를 끌었다. 2층 양옥집에 살던 정환이 책상에는 은색 기차 모양의 ‘하이샤파’ 연필깎이가, 이 집 반지하층에 세들어 살던 ‘덕선이’ 책상에는 ‘호돌이’가 그려진 세모난 샤파 연필깎이(KI-100)가 놓여 있었다.
굳이 드라마를 소환하지 않더라도 지금 40~50대라면 반짝반짝 빛나는 은색 기차 모양 연필깎이를 기억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본가 살림살이를 뒤져보면 하나씩 나올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됐더라도, 절대 내버려서는 안 된다. 40년쯤 묵은 녀석도 ‘무상’으로 수리를 받을 수 있으니까.
샤파 제조사 ‘티티경인’의 한 명뿐인 AS 담당자 김원래(63) 주임을 최근 경기도 이천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 일을 한 지 5년째. 그의 손을 거치면 모두 반짝반짝 하이샤파의 원형으로 복귀한다. “친정에서 발굴한 41년 된 하이샤파를 공짜로 고쳤어요” “돌아가신 아버지가 입학할 때 사주신 건데, 아들에게 물려줄 수 있게 됐습니다”.... 3대까지 이어지는 연필깎이의 전설이 알음알음 퍼지면서 요즘도 하루 평균 수리 의뢰가 15건 안팎 들어온다고 한다.
김 주임은 “사연 없는 연필깎이는 없다”고 말했다. “수십 년 전 제품도 공짜로 수리가 된다니, 못 믿는 사람이 많아요. 말끔히 고쳐 돌려보내면 감격했다고 또 감사 인사를 보내오고요. 연필깎이에 얽힌 추억을 보내주시는 분이 많아서 연필깎이 고치는 일이 날마다 보람되고 즐겁습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정환(류준열)의 책상에 은색 기차 모양 ‘하이사퍄’ 연필깎이가 놓여 있다. /tv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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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넘은 하이샤파
물질적 풍요가 넘치는 세상. 에어컨·세탁기 같은 비싼 가전제품도 ‘고쳐 쓰는 것보다 새로 사는 게 싸다’는 희한한 논리가 장사의 기본이다. 그런데 고작 몇 만원짜리, 그것도 수십 년 된 연필깎이를 공짜로 고쳐준다고?
-빨리 고장나서 버리고 새로 사야 회사에 득이 될 것 같은데요.
“창업주(고 조규대 회장)의 원칙이라고 합니다. 서울대 공대 출신이신데, 80년대에 내놓은 기차 연필깎이는 디자인이나 제품의 내구성 면에서 엄청 공을 들인 작품이었대요. 미래 세대를 길러내는 학용품이니 대충 만들고 많이 팔아 돈 벌자가 아니라 튼튼하게 만들어 오래 쓰자는 방침이었습니다.”
-제품 수리를 혼자 다 하시나요.
“예전에는 문구 도매상 매장에 AS 담당자들이 나가서 고쳐줬대요. 하이샤파 인기가 어마어마했거든요. 도매상들이 새벽부터 와서 ‘하이샤파 달라’고 줄 서 있고, 다른 도매상에 줘야 될 물건을 트럭에서 먼저 집어가기도 했대요. 큰 사랑을 받은 만큼 끝까지 회사가 책임지겠다고 했던 거죠. 그런데 문구업계도 저출생 문제로 직격탄을 맞았어요. 지금은 저 혼자 합니다.”
-가장 오래된 제품은 몇 년산이었나요?”
“81년도 제품인 것 같아요. 40년 넘게 어느 집 책상에 있었던 거죠. 그때 제품들은 일제(日製) 칼날을 써서 훨씬 내구성이 좋아요. 삭아버린 고무 패킹만 갈아주면 금방 제 역할을 합니다. 앞으로 100년도 쓸 수 있을 거예요. 그런 게 진짜 ‘명품’이죠.”
◇연필깎이에 깃든 인생들
김 주임은 수리를 맡긴 고객들로부터 받은 손편지를 파일에 차곡차곡 정리해뒀다. “아이들 공부하는 학교, 늦깎이로 글자를 배우는 어르신들이 모인 야학, 전국 곳곳에서 많은 사연이 들어와요. 하나하나 인생이 담긴 이야기인데 어떻게 쉽게 내버릴 수가 있겠어요.”
“85년에 제 국민학교 입학 선물로 받은 연필깎이인데, 벌써 40년이 다 되어가네요. 수리해서 대를 이어 사용하겠습니다.”(대구의 최병웅씨)
“부유한 집 친구들이 하나씩 가지고 있던 기차 연필깎이는 은하철도 999를 연상케도 하고, 너무나 갖고 싶었지만 저희 부모님은 사주실 형편이 못 되었나 봅니다. 성인이 되어 제 아이들에게 같은 연필깎이를 사주던 때의 뿌듯함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아이들보다 제가 더 좋아했으니까요.”(경남 진주의 김효진씨)
“구매한 지 38년쯤 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의 형이 세뱃돈 모아서 사고 한 번도 못 쓰고 하늘나라로 가버려서 제가 쓰게 되었고, 지금은 저희 애들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한테 아주 소중한 제품이라 수리를 요청하게 되었습니다.”(대구의 김종수씨)
“수리하고자 하는 샤파는 총 3개예요. 제가 사용한 것(1987년산), 아내가 쓰던 것(1991년산), 그리고 아이들이 사용 중(2012년산)인 것인데.... 수리를 보내기 전 샤파를 청소하다 예전 일이 많이 떠올라서 흐뭇한 시간이었습니다.”(서울의 서명수씨)
김원래 주임이 대표상품인 '하이샤파'를 들고 있다. 뒤편에 놓인 다른 연필깎이 모델도 대부분 생산 중이지만 하이샤파 판매량이 80% 이상을 차지한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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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기억에 남는 사연이 있으신가요?
“하나하나 다 기억에 남죠. 한번은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이 교실에서 사용 중인 연필깎이 여러 개를 한꺼번에 수리 맡기셨는데, 그 반 아이들 수십 명이 다 한마디씩 손편지를 썼더라고요. 그 마음이 너무 기특했습니다. 3대가 물려쓰기 위해 수리를 맡긴다는 분도 계속 이어지고 있어 흐뭇하고요.”
-별명이 도사, 요정이시라고요.
“이 일을 한 지 5년째인데, 딱 보면 답이 나와요. 대부분 고무 패킹이 삭아서 고장이 나는 경우가 많아요. 칼날이 아예 망가져서 바꿔야 하는 경우(1만5000원) 빼고는 전부 무상 수리예요.”
-못 고친 경우는 없나요?
“아예 망가진 경우 새 제품을 보내드릴 때도 아주 가끔 있어요. 더러 다른 회사 제품을 맡기시는 분도 있는데, 가능하면 해드리고 싶지만 부품이 완전 달라서 못 고치고요.”
-의뢰는 하루에 몇 건이나 들어오나요.
“한 번 유튜브에 소개됐을 때는 40~50건씩 들어와서 자정 넘어서까지 야근을 했어요. 나중에 사장님한테 너무 무리해서 일을 했다고 한 소리 들었지요. 제 속도대로 하면 된다고 하시는데, 기다리는 분들 마음을 생각하니 오버하게 되더라고요. 평균적으로는 하루에 15개 안팎 들어옵니다. 수리해서 그다음 날 바로 부쳐드립니다.”
◇열정과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이날 오전 10시에 만난 그의 손은 이미 새까맸다. 수리가 잘됐는지, 제대로 돌아가는 제품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연필을 깎아보는 방법뿐. 작업하는 책상은 매일 쓸고 닦아도 금방 연필밥 천지가 된다. 책상 아래 놓인 박스 하나에 몽당연필이 가득 차 있었다.
이날 오전 10시에 만난 김원래 주임의 손은 이미 새까맸다. 수리가 잘됐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연필을 깎아보는 방법뿐. 매일 쓸고 닦는 책상도 연필밥 천지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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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이라면 신물 날 것 같은데요.
“그럴 리가요. 제가 수리한 제품이 잘 돌아가나 깎아볼 때 사각사각 연필 깎이는 소리가 얼마나 듣기 좋은데요. 공장에서 생산된 새 제품도 판매되기 전에 몇 개 가져와서 몇 회전 만에 깎이기 시작하는지, 연필 한 자루를 끝까지 다 깎아보면 어떤지 시험 작동을 해봅니다. 장갑을 끼고 해도 손에 흑연이 묻는 건 어쩔 수 없고요.”
-주임님도 하이샤파 연필깎이의 추억이 있으신가요.
“딸(35) 어릴 적에 하이샤파는 못 사주고 그 하위 버전 연필깎이를 사줬던 것 같아요. 딸이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연필깎이가 고장나니까 어떤 아이가 어떻게 알았는지 이거 수리 맡기면 된다고 했대요. 딸이 ‘우리 아빠가 그 연필깎이 도사’라고 자랑했다고 하더라고요. 18개월 손주가 학교 갈 때 하이샤파 선물해줘야죠.”
김 주임은 수리한 제품을 보낼 때 직접 쓴 ‘캘리그래피 메시지’도 함께 동봉한다. ‘열정과 노력을 배신하는 내일은 없다’, ‘긍정의 힘 매사에 최선을 다하자’ 라는 두 가지 버전. “주말마다 책상에 앉아 붓펜을 들고 100장쯤 미리 써둬요. 수리 내역서에도 제 이름과 ‘AS 완료’라는 메시지를 미리 적어두고요. 취미 생활인데 고객 분들이 참 좋아하세요. 글씨체가 예쁘다고 칭찬도 하시고, 어떤 분들은 캘리그래피 메시지를 더 받을 수 있느냐고도 해요.”
여러 포털 사이트나 커뮤니티에 하이샤파 연필깎이를 무상으로 AS 받은 후기가 올라와 있다. 김원래 주임은 수리를 완료한 제품을 돌려 보낼 때 직접 쓴 캘리그래피 메시지를 동봉한다. /S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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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100개 가까이 다양한 연식의 제품을 고치다 보면, 요즘 생산되는 제품의 단점도 보인다. 김 주임은 “최근 신제품들이 망가져서 들어오면 수리를 해보고 ‘스프링이 약하다’, ‘칼날에 문제가 있다’ 같은 내용을 정리해 제품 생산 파트에 전달한다”며 “결국 고객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게 제품력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하이샤파의 전성기는 1990년대였다. 출생률이 떨어지면서 연필 쓰는 아이들이 줄고, 태블릿PC 등을 이용한 학습이 늘면서 연필을 쥐는 시간 자체가 줄어들었다. 하이샤파도 한때는 경기도 여주의 자사 공장에서 생산했지만, 현재는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한 상태. 그럼에도 연간 17만대 정도 생산되고 대부분 국내에서 판매된다. 레트로 유행을 공략해 기차 색상도 ‘시그니처’ 실버에 더해 골드·블랙 버전까지 늘렸다. 디자인에는 40년 넘게 큰 변화를 주지 않고 있다. 티티경인 주재명 이사는 “가격 경쟁력에서는 중국산 저가 제품에 밀리지만 탁월한 제품력 덕에 수십 년간 사랑을 받고 있다”며 “40년 넘게 튼튼한 연필깎이를 만들고 고장나면 AS로 고쳐주는 장인 정신을 쭉 이어갈 것”이라고 했다.
[김경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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