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 ·12 쿠데타 이후 보안사령부에서 기념촬영한 신군부 세력. 앞줄 왼쪽에서 넷째가 노태우 전 대통령, 다섯째가 전두환 전 대통령. 두 사람은 하나회의 창설자이자 리더였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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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관, 군인들은 사직을 우예 합니꺼? " " 사표는 따로 없지만 통수권자의 인사 명령엔 복종합니다. " " 아… 그래요? 그라모 됐고마는. 육참총장하고, 기무사령관을 오늘 바꿀라캅니다. " 문민정부 출범 11일째인 1993년 3월 8일. 김영삼(YS) 대통령은 아침부터 권영해 국방부 장관을 청와대 관저로 불렀다(『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후루룩 아침을 먹은 두 사람은 집무실로 갔다. 대통령과 장관의 극비. 3시간 뒤 YS는 김진영(육사 17기)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육사 19기) 기무사령관을 전격 해임했다. 느닷없는 해임 통보에 두 사람은 공식 일정을 수행하다 갑자기 옷을 벗었다.
당시 전두환·노태우 후계 그룹의 선두였던 김진영과 군 정보 책임자인 서완수는 하나회 실세였다. 이들의 후임으로는 하나회가 아닌 김동진(육사 17기) 연합사 부사령관이 육군참모총장으로, 김도윤(육사 17기) 기무사 참모장이 기무사령관으로 발령났다. 발표 직후 임명장을 주고, 취임식을 진행했다. 행여 모를 군부의 반발을 의식해서였다.
1993년 권영해 국방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김영삼 대통령. 중앙포토 |
통일원 차관을 지낸 김석우 당시 청와대 의전비서관은 “군이 거부할 수 있다는 우려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전광석화처럼 집행한 것”이라며 “청와대 비서진도 몰랐던 일”이라고 말했다. 군부는 충격에 휩싸였고, 국민은 환호했다. 하나회 척결은 군정 종식의 증표였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 수석비서관 회의에 나타난 YS가 씩 웃으며 말했다.
" 모두 깜짝 놀랐재? " 이 발언은 훗날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김석우 당시 비서관은 “진짜 깜짝 놀랐지만 비서진들은 모두 대통령을 지지했다”며 “YS가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YS는 정말 용기 있는 지도자’라는 생각을 했다”고 회상했다.
4월 2일엔 기무사와 함께 ‘실세 3사’인 수방사·특전사 사령관을 교체했다. 이어 12·12 사태 관련 고위 장성 해임 결정 등 중·소장급 전격 인사가 이어졌다. 4개월간 하나회 척결이라는 뚜렷한 목표 아래 군 인사가 휘몰아쳤다. 이때 장성 50여 명, 장교 1000여 명이 옷을 벗었다(『대통령과 국가경영』).
인사 규모가 워낙 커 임명식에서 대통령이 직접 달아줘야 하는 계급장(별)이 부족했고, 급한 대로 현장에 있는 장성들의 계급장을 떼어 달아줄 정도였다. 이후 하나회 출신들은 영관급 이하까지 진급과 직위에서 배제했다. 하나회 척결의 마무리 수순이었다.
그러나 잔존한 하나회 세력들의 불만은 쌓여 갔다. 문민정부는 고위 간부급 장교들을 예의주시했다. 1979년 12·12 주범도 전두환·노태우 소장을 비롯한 장세동·허화평·허삼수 등 영관급 장교들이었기 때문. 그리고 1년이 지난 초가을 어느 날. 군부에선 커다란 폭풍의 씨앗이 감지됐다. 미처 쳐내지 못한 하나회 일부가 쿠데타를 기도하고 있던 것이다. 주동자로 이름을 올린 장성과 영관급 장교만 10여 명에 달했는데 이를 안 YS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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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리에 진행된 군부 개혁
1987년 통일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추대된 김영삼 총재와 이날 입당이 전격 발표된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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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회 척결은 YS 취임 전부터 비밀리에 계획된 일이었다. YS는 오랜 기간 국회 국방위에서 활동하며 일찌감치 군 개혁을 중요한 과제로 생각했다. 특히 1987년 대선 막바지에 영입한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하나회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김영삼 재평가』).
YS가 첫 국방부 장관을 권영해(육사 15기)로 발탁했지만 육군 소장 출신인 그가 중·대장급 장성들을 내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당시 국방부 인사국장도 하나회여서, 부국장을 통해 인사안을 정리토록 했다. 당시 YS는 뜬눈으로 밤을 새우곤 했고, 새벽 조깅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김영삼 민주센터 녹취록』).
YS가 이토록 하나회 청산에 매진한 이유는 뭘까. 아들이자 참모였던 김현철은 “아버지께선 오랫동안 군사정권에서 민주화 투쟁을 했고, 군부 세력 중에서도 하나회를 제거하지 않으면 문민정부의 개혁을 진행해 나가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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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전 하나회의 도발
1984년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보직 신고 중인 최세창 육군중장(오른쪽).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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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문민정부 출범 직전인 1992년 12월 최세창 국방부 장관은 기자간담회에서 차기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국방부 장관은 군 출신이 맡아야 하며 군은 차기 정부와 잘해 나갈 것이라는 식의 발언을 했다(중앙일보 92년 12월 22일자). YS는 이를 “문민정부를 향한 노골적인 도발”이라고 여겼다.
“취임 전 최세창 장관은 ‘향후 군 편제는 이래야 한다’ ‘군의 진로는 이렇다’ 등의 발언을 했는데 이는 마치 ‘앞으로 군대는 하나회에서 관리하고 통제하겠다’는 의미로 들렸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 개혁에 대한 각오를 단단히 한 순간이었다.”(『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당시 외신에서도 ‘김영삼은 군부와 손잡고 가야 한다’는 식의 의견이 나올 때였다. 그러나 YS는 “웃기지 마라, 내가 대통령 하면서 그렇게 드럽게는 안 한다”고 일갈했다(『SBS 다큐 한국현대사증언』). 문민정부 공보처 장관이던 오인환은 “하나회 제거는 민주화의 완성이었다”며 “과감한 개혁으로 쿠데타 못지않게 온 사회를 긴장시켰다”고 했다.
하지만 하나회 제거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계속)
수십 년간 권력의 핵심이던 하나회를 뿌리뽑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임기 2년차인 1994년 '하나회 잔당'의 쿠데타 계획이 발각된 겁니다. 하지만 YS는 예상과 달리 조용히 묻고 가기로 했습니다. 그 해엔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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