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탄핵소추… 원로 인터뷰]
[2] 104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
원로 철학자 김형석(104) 연세대 명예교수는 당혹감이 채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이번 대통령의 비상계엄령 선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고 털어놨다. 한 세기 넘게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지켜본 그로서도 뜻밖의 상황에 직면했던 것이다. 김 교수는 윤석열 대통령이 2021년 3월 검찰총장직을 사퇴한 뒤 첫 외부 일정으로 찾아가 만난 ‘어른’이었고, 그는 당시 “마음 그릇이 비어 있다면 정치를 해도 된다, 전문가 의견을 적극 받아들여라, 정치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다”라고 조언했다.
김 교수는 “이번 사태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존재하겠지만, 내가 가장 크게 느끼는 것은 ‘리더십 빈곤’의 문제”라고 했다. 다수 의석을 차지한 야당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대신 줄곧 정부를 흔들었고,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당선됐음에도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는 “정치 지도자들이 공동체 의식과 역사관을 제대로 지니지 못한 결과”라고 했다. 또 “지금까지 우리는 정치적 독재인 ‘권력 국가’에서 시작해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뒤 ‘법치국가’로 들어섰지만, 아직 도덕과 윤리가 지배하는 ‘질서 국가’로 들어서지 못한 상태에서 다시 권력 국가로 후퇴할 위기에 놓였다”고 말했다.
계엄, 민주국가 선택지엔 없는 항목
―2024년에 지금 같은 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왜 이렇게 된 걸까요?
“플라톤은 ‘지도자의 무지(無知)는 사회악이 된다’고 했어요. 정치 지도자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르고 있다면 국민이 불행해지게 됩니다. 국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민주당 역시 국민을 위한 역할이 큰데 그걸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대통령뿐 아니라 야당도 책임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이재명 대표가 과거 문재인 정부의 실정(失政)을 극복하고, 정권 창출을 위한 정치를 하는 대신 나라와 국민을 위해 잘 이끌어주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그가 가는 길이 국민이 원하는 것도, 국가가 가야 할 방향도 아니고, 오로지 윤석열 정부를 무능하게 만들어 정권을 쟁취해야겠다는 목표밖에는 없었던 것 같아요. 더욱 나쁜 것은 이재명이라는 사람의 과거를 덮기 위해 행정부와 사법부에 압력을 가한 점입니다. 이대로 가게 되면 대한민국의 정치 방향은 이재명 개인을 위한 것이 됩니다.”
―계엄령 선포를 야당이 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원인 제공은 민주당이 했죠. 그러나 의사가 환자를 고치는 것에 비유하자면 먼저 약을 주고 나서 안 되면 주사를 놓고 그래도 안 되면 수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계엄령을 선포한 것은 약도 주사도 없이 다짜고짜 메스를 들고 수술부터 한 셈이니 국민들이 놀랄 수밖에요. 이건 민주주의 국가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그 노선을 따르려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지지했던 것인데, 이제 보니 자유민주주의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 건지 몰랐고, ‘이 정부 가지고는 잘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이죠.”
―왜 이런 리더십의 부재가 나타나게 된 것일까요.
“한 개인이나 한 민족이 자리를 잡고 살게 되면 꼭 필요한 생각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공동체 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관’입니다. 공동체 의식이란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거짓 없이 정직하게 해야 하고, 불의를 정의로 바꾸면 안 되며, 마지막 목표는 자유와 인간애(人間愛)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역사가 바뀐다고 해도 공동체에서는 이걸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이죠.”
―우리가 그런 의식을 잃어버렸다는 말씀이군요.
“문재인 전 대통령은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왔다 갔다 했습니다. 운동권 출신들과 정권을 함께 운용하면서, 북한의 노선과 대한민국의 노선을 구별하지 못하고 혼동했습니다. 김정은과 잘 의논하면 더불어 살고 통일까지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한 것 같아요. 착각이었습니다. 북한은 이미 오래전부터 대한민국과 동질(同質) 사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체(政體)가 완전히 다른데 이를 무시하는 대북 정책을 펼치니 결국 국민을 분열시켰죠.”
진보·보수는 공존할 수 있는 가치
―국민의 분열 현상이 매우 심각해 보입니다.
“냉전 시대에는 좌(左)와 우(右)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선진국가들은 이후 좌·우를 벗어나 각각 진보와 보수로 바뀌었습니다. 좌·우일 때는 하나만 남고 다른 하나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진보·보수로 성장해서는 ‘공존해야 한다’는 의식으로 발전하는 것이죠. ‘열린 보수’ ‘열린 진보’로 바뀌면 공존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나 문 전 대통령은 좌·우를 더 갈라놨단 말이에요. 이제 정권이 바뀌었으니 좀 변할까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공동체 의식과 함께 역사관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역사관이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한 시대를 산다고 하는 것은 흐르는 강물 가운데 한 단계를 사는 것이며, 그 지점은 상류의 물이나 하류의 물과는 다른 곳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지도자에겐 그 한 시대를 볼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또한 세계에서 동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한국이 아니라 세계 속의 한국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보기에 우리 정치 지도층은 그걸 할 줄 모릅니다.”
―좀 지나친 말씀 같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법조계 출신 사람들은 기억력이 좋은 반면 사고력이 부족하고, 운동권 출신들은 국제 감각이 부족합니다. 또 우리 사회에선 과거를 절대시하고 미래를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어요. 오늘날 우리가 사는 것을 어떤 과거의 결과로 볼 게 아니라, 미래를 개척하고 방향을 찾기 위해 과거를 돌아보는 태도가 바람직합니다.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이 리더십을 가지게 되면 과거를 끌어안고 살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같은 사태가 벌어지게 됐군요.
“현재의 문제를 더 크게 역사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신생국과 후진국이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는데, 첫째 단계가 정치적 독재와 군사정권이 들어서는 ‘권력 국가’입니다. 우리는 이승만·박정희 정부가 해당하죠. 하지만 세계의 다른 나라와 달리 한국은 군사정권을 거치며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다음 단계는 무엇입니까.
“두 번째 단계는 법이 지배하는 ‘법치국가’입니다. 우리는 문민정부 때 이 단계로 진입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때부턴 외국에 나가도 한국인이라는 게 부끄럽지 않았어요. 그다음 단계가 ‘질서 국가’죠. 법이 지배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도덕적 가치와 윤리적 상식이 지배하는 단계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단계에 이른 건가요.
“질서 국가로 가다가 좌절한 상태입니다. 노무현·문재인 정부에서 운동권이 정치에 참여하면서 다시 권력 국가로 역행할 위기가 생겨났습니다. 이 분위기는 여야가 마찬가지입니다. 민주주의를 모르면 국민을 힘으로 지배하려 하게 되는데, 이번 계엄이 바로 그런 것이라 볼 수 있어요.”
그래픽=양진경 |
―‘민주주의의 3단계’에 대해 말씀해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영국의 경험주의(Empiricism) 사상에서 출발했습니다. 대륙의 합리주의처럼 이념을 세워 놓고 현실을 맞춘 게 아니라, 현실에서 더 선하고 정의로운 게 무엇인지 찾은 것이죠. 이것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바라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로 발전했고 정치적으론 의회민주주의의 탄생을 이뤘습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열매가 많은 것이 진리라는 실용주의(Pragmatism)로 나타났습니다. 실용주의의 열쇠는 대화였습니다. ‘내 생각은 이렇고 네 생각은 이런데 더 좋은 방법을 찾자’는 것이었죠.”
민주주의 발전의 ‘정점’은 대화
―우리는 ‘대화’를 하지 못했군요.
“미국이 중국에 대화를 제의하는 것은 ‘원수이기 때문에 제일 먼저 만나 대화한다’는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윤 대통령이 실패한 것은 대화를 통해 국민 여론을 끌고 가는 대신 계엄을 통해 힘으로 누르려 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됐습니다.
“혼란이 일어나겠지만 국민의 선택이고, 이제 법적 절차를 밟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태의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지만, 그 원인은 야당이 만들었다는 것도 가볍게 보면 안 됩니다. 민주당이 바뀌어야 나라가 바뀝니다. 정의(正義)를 ‘권력을 가지고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여긴다면 권력 국가로 다시 후퇴합니다. 정의란 ‘더 많은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와 의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지금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이 난국을 넘기고 나면 어떤 희망이 있는가 생각해 봤는데, 지금 이 리더십을 가지고는 희망을 안겨줄 사람도 정당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일상으로 돌아가고, 모든 공무원과 사회 지도자들이 애국적이고 민주적인 방향으로 다시 나아가는 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앞날을 비관적으로 보시는 건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과거 80년 동안 이만큼 나라를 건설한 민족이니 결국은 이 위기만 넘기면 다시 정상적인 사회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정치권이 지금까지와 달리 방향을 잘 잡아줘야겠죠. 서두르지 말고 역사의 강물이 바다로 흐르듯 앞으로 나아가면, 인간애의 나무에 자유와 평등의 열매가 함께 열리는 질서 국가로 들어설 날이 올 것입니다.”
☞김형석 교수
1920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났다. 김일성이 초등학교 선배, 시인 윤동주가 평양 숭실중 같은 반이었고, 김수환 추기경과 일본 조치(上智)대에서 동문 수학했다. 학창 시절 도산 안창호의 강연을 듣고 그를 인생의 사표로 삼았다. 25세에 광복을 맞아 공산주의를 겪고 월남했다. 대한민국 1세대 철학자로서 연세대 철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윤석열 대통령의 부친인 고(故) 윤기중 교수와 함께 재직했다. 104세인 지금도 왕성한 집필과 강연을 하고 있다.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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