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죄 피의자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을 앞둔 1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모여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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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희 | 대구대 경제금융학부 교수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 이는 윤석열이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선물받은 명패에 적힌 문구로, 그의 집무실 책상을 장식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를 ‘모든 권력은 내가 쥔다’로 오독한 그는 무책임의 극치를 보이며 12월14일 마침내 탄핵소추를 당했다. 무모한 정치 도박으로 제 무덤을 판 그의 행태를 보건대 남은 임기를 채웠다 해도 파란의 연속이었을 테다. 그러니 한국 현대사에 비극으로 기록될 이 사태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는 지혜가 필요하다.
2024년 12월3일, 45년 전 계엄의 망령이 살아나 이 나라 민주주의의 민낯을 드러냈다.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나 한류를 꽃피웠고, 광주항쟁의 비극적 서사를 시적 산문으로 승화한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에 기뻐하는 그해에 계엄이라니, 참담했다. 오죽하면 미국이 윤석열을 호통쳐주길 바랄 지경이었다. 한국 대통령이 혹여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니 미국의 도청도 묵인해야 하나, 그가 혹여 대북 도발도 감행할지 모르니 전시작전권 환수도 당분간 언감생심인가, 비애와 자괴감이 엄습했다.
필자는 이 사태의 비용을 경제로만 국한해 바라보는 일각의 경제제일주의를 경계한다. 이게 어찌 경제만의 문제인가? 우리의 인간됨이 정면 부정당하는 문제이거늘. 작금의 비극이 벌어진 한국 정치의 구조적 결함에 대한 뼈아픈 성찰이 시급하다. 제왕 아니 여왕의 군림을 허용한 대통령제, 적대적 공생관계에 안주하는 거대 양당 과두정치, 그 필연적 산물인 정치 양극화 등의 취약성이 여실히 드러났다. ‘충암파’로 대변되는 망국적 정실주의, 음모론과 가짜뉴스로 확증편향을 부추기는 진영 논리의 폐해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지경이다.
하지만 우리는 1987년 이래 37살 신생 민주공화국의 시민불복종과 법치가 민주주의의 신속하고 강인한 회복력의 근간임을 세상에 각인시켰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모리스 알브박스가 제시한 ‘집단기억’의 순기능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나라가 위태로우면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 우리는 민주주의 쟁취의 집단기억을 체화하고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으로 남는 것”(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감)의 두려움에도 본능처럼 몸이 먼저 반응한다. 계엄이 선포되자 엄동설한에도 한밤중에 국회로 달려가고 함께하지 못한 미안함을 ‘선결제’로 나누는 공동체 의식을 거슬러 올라가면, 1980년 광주에서 주먹밥을 나누며 피 흘린 집단기억에 이른다. 이렇게 얻어낸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감과 효능감이라는 역린을 누군가 건드리면 시민적 저항이 폭발한다. 이는 안전하고 즐길 수 있는 독특한 시위 문화의 핵심 토대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인용에 이르기까지의 지난한 여정이 지닌 세계사적 함의를 자각할 때다. 국내 탄핵 정국은 전세계가 주목하는 사안이 되었다. 특히 전세계 폭정자들이 두려움으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이번 사태의 대외적인 함의가 묵직하다.
이 사태의 원숙한 해결 여부는 한-미 동맹 2.0의 가능성을 점치는 리트머스 시험지이기도 하다. 한국은 전후 미국의 원조 수혜국에서 바이든 정부의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핵심 파트너로 거듭나, 미국에 내줄 것도 생긴 최초의 동맹으로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일궈냈다. 이는 2023년 한국이 미국 내 외국인 직접투자와 관련해 고용창출에서 1위를 점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도 당선 확정 후 일성으로 한국에 (군함) 조선 협력을 제안해 한국이 미국 안보에도 긴요한 파트너임을 입증했다. 나아가 이번 사태로 우리는 미국 정치의 미래를 비출 거울이 될 소중한 기회도 얻었다. 2021년 1월6일, 미국에서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려는 이들이 넘었던 국회의사당 담장을, 한국에서는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이들이 넘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여차하면 폭력과 약탈이 수반되던 시위 현장을, 한국에서는 비폭력과 나눔의 축제 현장으로 탈바꿈시켰기 때문이다. 이야말로 한-미 동맹의 재도약이다.
여전히 독재와 전제정에 신음하는 개발도상국은 물론 우리에게 민주주의의 모델로 여겨졌던 서방의 민주주의도 위기에 처한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민주공화국의 전범을 보여줄 때다. 이야말로 한류의 정수다. 자, 엄동설한에 국민을 길거리 축제로 내모는 몹쓸 정치, 제대로 갈아엎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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