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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 (토)

“北학자들, 내몽골까지 고조선 강역으로 간주해  中과 역사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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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즈민 일기’ 펴낸 강인욱 경희대 교수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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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강상(崗上) 무덤 발굴 ‘비파형동검’은 평양의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도 거의 똑같은 것이 있다. 차이점이라면 북한에 있는 유물은 진품이고, 남한에 있는 건 복제품이라는 것. 이것은 1963~65년 북한과 중국이 다롄 일대를 공동으로 발굴 조사한 끝에 찾아낸 고조선의 핵심 유물이다. 다만, 당시 중국 측은 북한의 ‘고조선’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청동기’ 유물이라고만 명명했다. 고조선의 강역을 둘러싼 북한과 중국의 고대사 논란이 이때 본격적으로 불거진 것이다.

중국 고고학자 안즈민(安志敏·1924∼2005)의 일기를 최근 번역 출간한 강인욱 경희대 교수(북방 고고학)는 18일 기자와 만나 “1960년대 북중 고고 발굴단(조중 고고 발굴대)은 구성부터 운영까지 다분히 정치적 색채가 강했다”고 설명했다. 1960년대 중소갈등이 본격화되면서 북한을 자국 편으로 끌어 들어야 했던 중국이 북한의 공동발굴 요구를 받아들였다는 얘기다. 당시 북한 역사학계에선 고조선 중심지를 중국 대릉하 일대로 보는 ‘요동(遼東) 중심설’이 주류였다. 이에 따라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王儉城)이 평양이 아닌 요동에 있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중국 현지 발굴조사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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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즈민은 북중 발굴단에서 중국 측 고조선 연구팀을 이끈 고고학자. 그는 자신의 일기에 리지린(1915∼?) 등 북한 학자들과 겪은 갈등을 비롯해 공동 조사과정에서 겪은 일화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안즈민 일기’(주류성)에 따르면 북한 학자들은 중국 요동지역의 하이청현 일대를 고조선 수도인 왕검성으로 지목하고 관련 증거를 찾기 위해 곳곳을 답사했다. 하지만 중국 측은 이들이 찾아다닌 성터들 대부분이 명나라 때 조성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양측의 역사 갈등은 ‘스파이 논란’으로까지 비화됐다. 북한 학자 리지린이 1959~1961년 베이징대에서 고조선에 대한 박사논문을 쓸 때 지도교수였던 고힐강(顧頡剛)이 간첩활동을 도와준 혐의로 취조를 받기도 했다.

양국의 역사 갈등 이면에는 북중 발굴단이 한창 활동하던 1964년 체결된 ‘북중 국경 조약’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북중 접경지대인 만주지역은 고대부터 한민족의 활동무대였던데다 조선인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강 교수는 “당시 북한 학자들은 내몽골까지 고조선의 강역으로 확대해 보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며 “북한이 고조선 강역을 바탕으로 만주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것을 중국이 우려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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