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당일 기갑여단장이 갑자기 정보사에 불려 가 대기한 사실은 여러 가지 의혹을 낳는다. 계엄 반대 시위가 대규모로 커진다거나 정치인 체포 등 작전에 어려움이 생길 경우 전차 등 기갑전력까지 투입하려 했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2기갑여단은 1979년 12·12 쿠데타 당시 전차 35대를 동원해 중앙청과 국방부, 육군본부를 장악했던 부대다. 2017년 국군기무사령부의 ‘계엄 검토 문건’에도 2기갑여단은 계엄군에 편성되는 것으로 돼 있다.
이는 계엄 선포가 야당에 대한 경고성 조치였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주장이 사실과 다름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방증이 아닐 수 없다. 계엄이 장기간에 걸쳐 준비됐음은 검경 수사에서 드러나고 있다. 윤 대통령이 이미 작년 말 ‘비상조치’를 언급하며 계엄 의지를 나타냈다는 증언이 확보됐다. 계엄 이틀 전 전현직 정보사령관과 간부들이 사전 모의한 정황도 드러났다.
나아가 계엄 당시 병력 1500여 명이 투입됐고, 군 차량 100여 대와 헬기 12대가 동원됐음이 확인됐다. 계엄군은 저격용 총과 기관단총 등을 휴대했고, 실탄도 비록 개인 지급은 없었지만 1만 발 이상 불출됐다. 만약 국회에서 유혈 충돌이 일어났다면 현장 계엄군에게 어떤 명령이 내려왔을지, 거기에 전차 장갑차까지 동원됐다면 어땠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12·3 계엄 사태는 집권자가 더 큰 권력을 위해 불법적 수단으로 벌이는 전형적인 친위 쿠데타(self-coup)였다. 윤 대통령은 “두 시간짜리 내란이 어디 있느냐”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국민과 국회의 기민한 저지, 계엄군의 소극적 사보타주로 실패한 것일 뿐이다. 애초부터 실패를 전제로 한 계엄이었다는 식의 해괴한 변명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두고 볼 일이다.
ⓒ 동아일보 & dong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