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여리여리했다.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제임스 서클링의 첫 와인 '미래 빈야드(Mirae Vinyard)' 2023 빈티지다. 투명하면서 장미를 연상시키는 연한 루비 색상이다. 와인잔에 따라져 있는 모습을 보곤 내츄럴 와인이나 오렌지 와인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였다. 딸기 같은 붉은 과실의 향이 올라오더니 꽃향기까지 우아하다. 근래 들어 만나보기 드물었던 피노누아다.
사실 새로운 모습이 아니다. 원래 피누누아는 그랬다. 피노누아의 고향이라는 부르고뉴마저 쉬라즈 같은 진한 색상에 알코올 도수가 13도는 기본으로 올라가는 요즘이지만 신선하면서 가볍고, 섬세해야 피노누아다. 어찌보면 서클링이 선보인 '미래 빈야드'는 피노누아의 '오래된 미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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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클링은 지난달 한국을 방문해 직접 만든 와인을 처음으로 공개하는 자리를 갖고 "뉴질랜드는 주요 와인 생산국 가운데 기후변화에 따른 지구온난화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곳"이라며 "뉴질랜드의 밝고 신선한 피노누아는 1980년대의 고전적인 부르고뉴 피노누아와 비견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서클링은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와인 평론가다. 40년 넘게 테이스팅한 와인만도 25만여종에 달하며, 와인 플랫폼 제임스서클링닷컴을 통해 발표하는 와인 평점에는 와인 업계가 예의주시한다. 국내에서도 이름을 한국식으로 바꿔 '제석이 형'이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 인지도가 높다.
지난 2022년 뉴질랜드 마틴보로를 찾았다가 와이너리 매각 표지판을 본 게 와인 양조의 출발점이 됐다. 마틴보로는 부르고뉴와 유사한 기후와 토양으로 뉴질랜드에서도 최고의 피노누아 산지로 꼽히는 곳이다. 와이너리는 제임스가 10년 전 방문 당시 깊은 인상을 남겼던 곳인데 소유주가 사망하면서 매물로 나오게됐다. 1958년생인 그에게 더 이상 가보지 않은 길로 후회할 시간은 남지 않았고, 와인 평론가로서 와인 양조를 좀 더 잘 알았으면 했던 그간의 마음도 더해졌다. 대출만 받지 않으면 된다는 아내 마리 김 서클링의 조건을 통과하면서 이 모든 여정이 시작됐다.
서클링은 "지구상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뉴질랜드라는 나라도, 천혜의 환경에서 만들어지는 와인도 모두 미래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말 미래의 발음을 그대로 가져다 와인명으로 썼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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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블 디자인은 소주 '참이슬'의 글씨로 유명한 강병인 작가의 캘리그래피다. 길에 떨어져 있는 포도나무의 가지를 발견하고는 먹에 찍어 쓰면서 필체도 그렇지만 느껴지는 질감도 독특하다. 사실 와이너리를 사들이고 첫 해인 2023년은 비가 너무 많이 오면서 포도경작이 쉽지 않았다. 좋은 포도를 고르기 위해 신중을 기하다 보니 생산량이 1600병 밖에 안됐다. 2023 빈티지를 한국과 홍콩에서만 출시하는 것도 그래서다.
와인은 짧은 발효과정을 거치고, 새 오크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7개월 동안의 배럴 숙성 후 조금은 빠른 병입을 진행했다. 그 결과 무겁지 않고 섬세한 와인으로 탄생했다. 알코올 도수도 12도로 가볍다. 일반적인 레드와인보다는 조금은 차갑게 해서 마시면 좋다.
그는 "와인양조는 특별한 장소와 의사소통을 하는 것으로 모두 손수 작업을 하며 헤리티지를 보존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며 "2024년은 기온이 더 높았고 건조해 내년엔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라고 예고했다. 생산량도 좀 더 늘어 3000병 안팎은 나올 것으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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