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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0 (금)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햄버거 넷, 셋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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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운 얘기이지만 40년도 넘은 먼 옛날엔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햄버거 계가 있었다. 브랜드 햄버거와 밀크셰이크 값이 당시 고등학생에겐 적지 않은 돈이었다. 서너 명이 계를 만들고 돈을 몰아주었다. ‘맥도날드’가 한국에 상륙한 건 의외로 늦어서 1988년이었다. 그것보다 먼저 들어온 외국 브랜드는 ‘훼미리 햄버거’ 같은 일본계였다. 당시엔 캐셔가 주문을 외치면 주방에서는 “투 햄버거, 로저”라고 답해야 했다. 롯데리아는 “햄버거 둘, 셋업”이라고 누군가 내게 일러주었다. 지금도 그렇다면, 안산의 그 지점에서는 “햄버거 넷, 셋업”이라고 외쳤을 것이다. 햄버거 네 개는 단순한 숫자에서 ‘밈’이 되었다. 그 자리는 동시에 내란 셋업이었다.

요즘은 사람 뽑기 힘들다던데 과거 햄버거집 아르바이트 자리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폼 나는 유니폼을 입고 영어로 주문을 넣을 수 있었다. 1988년도에 맥도날드 압구정점에서 일했던 내 선배는 초등학생이 친구들과 햄버거 주문을 하고 10만원짜리 자기앞수표를 꺼내서 혀를 내둘렀다고 고백했다. 강북 살던 우리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강남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군대에서 주는 햄버거를 군대리아라고 하는데, 내가 최초로 그것을 먹은 군번이다. 소고기 패티 같은 건 없었다. 대신 제일제당의 밀가루 소시지를 쪄서 주었다. 그걸 ‘햄’이라고 군대는 우겼고, 그래서 햄버거는 틀린 말이 아니라고 군수 담당자가 얘기했다. 다단식 취사기에 찐 ‘햄버거용’ 빵을 두 개씩 먹었다. 물려버린 선임병들은 졸병들에게 던져줬다. 쪄서 김이 뿌옇게 서려 있던 비닐봉지와 쪼글쪼글해진 그 빵이 생각난다. 그건 그렇고 채 상병 수사는 어떻게 되는 건가. 국민들은 다시 박정훈 대령을 생각한다. 윤석열 정부는 이미 그때 난파선이었음을 만천하에 알린 셈이었다.

계엄 소식을 나는 타국에서 들었다. 동료가 만원짜리를 꺼내면서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가 되는 거냐고 말했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많이 아팠다. 거울을 보니 10년은 늙어 있었다. 국민들이 거개 그랬을 것이다. 심하게 아팠을 것이다. 잠을 설쳤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일생에 계엄을 세 번을 맞았다. 박정희의 유신, 전두환 집권 무렵, 그리고 윤석열이다. 그 독한 홍역 예방주사도 한 번인데, 이건 너무한다 싶다.

오랫동안 경향의 이 지면으로 독자들을 만났다. 한 시국도 평안하지 못했다. 음식 칼럼인데 사회 칼럼이 되곤 했다. 세월호 때 생각이 난다. 폭식투쟁이라면서 음식과 아이들을 모독하는 이들 때문에 분노의 글을 썼다. 제사상에 올라간 피자 때문에 시민들은 또 목이 메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한국의 현실은 결국 이 마지막 칼럼에 햄버거를 소환하게 만들었다. 죄 없는 햄버거가 또 입길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아, 수사받으실 분들 많을 텐데 배달은 해장국으로 하실 건지 짜장면으로 하실 건지 미리 생각해두길 바란다. 햄버거도 괜찮다. 빨리 먹고 수사받을 수 있으니까.

경향신문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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