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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0 (금)

[김봉석의 문화유랑]망상의 세계에서 출몰하는 유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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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거짓과 가짜뉴스로 대중을 사로잡은 로저 에일스의 만행을 그린 드라마 <라우디스트 보이스>.


12월3일 밤, 10시 반이 지난 시각이었다. 페이스북과 엑스 등 소셜미디어를 뒤적거리다 ‘비상계엄 선포’라는 포스팅을 발견했다. 농담인가, 가짜뉴스인가, 소설인가 생각하다가 포털 사이트의 뉴스를 찾아봤다. 한 줄짜리 속보가 있었다. 비상계엄 선포는 현실의 사건이었다. 다시 소셜미디어와 유튜브의 국회 앞 생중계를 보면서 당황했다. 전혀 현실감이 없었다. 이전의 계엄이 45년 전이었던가.

국회의 빠른 결의로 계엄은 해제됐다. 당시만 해도 비상계엄은 그저 술주정뱅이의 객기인가 의심했다. 하지만 이후 드러난 사실과 폭로 등을 살펴보면 몇개월간 어쩌면 몇년간 치밀하게 준비했던 ‘내란’으로 보인다. 자신의 적으로 간주한 이들을 모두 체포하고, 민주주의 대신 독재를 꾀한 친위 쿠데타. 법을 무기로 평생을 살아온 자가 법을 송두리째 무시하고 구시대 독재자들과 같은 길을 가려 했다는 현실을 믿기 힘들었다. 대통령이며 내란 수괴인 그는 망상의 세계에 빠진,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무뢰한이었다. 부정선거로 야당이 다수당이 되었고, 북한 간첩이 한국 사회 주요 시스템을 장악하고 있다며 음모론을 선동하는 극우 유튜브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대통령 취임식에도 극우 유튜버들이 초대되었다.

일간지와 TV 방송국 등 올드 미디어의 영향력은 이미 유튜브와 소셜미디어 등 뉴 미디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치밀하게 팩트를 모으고, 가치판단을 하면서 검증하는 올드 미디어보다 자극적인 언어로 팩트를 교묘하게 짜깁기하고 가짜정보로 현혹하는 사기꾼들이 대중을 사로잡고 있다. 언론 행세를 하면서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는 극우 유튜버들이 문제의 중심이다. 하지만 문제는 더 있다.

소셜미디어의 확증편향은 ‘알고리즘’을 통해 강화된다. 영상 하나를 보고 나면, 선택하지 않아도 영상이 이어진다. 이미 본 영상과 비슷한, 연관된 영상을 자체적으로 골라서 보여준다. 유튜브 메인을 들어가면, 이전에 내가 본 영상들을 기반으로 추천하는 영상들이 제시된다. 추천은 필요하다. 하지만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의 알고리즘 추천은, 최근 본 영상을 기반으로 비슷한 것만 보여주기 때문에 관심이 없거나 반대의 시각으로 보는 영상을 점점 외면하게 된다. 목적의식적으로 다른 영상을 찾지 않는 한, 내가 좋아하고 믿는 것만을 계속해서 보고 있다. 자진해서 ‘세뇌’의 길에 빠져드는 것이다.

사이비 종교나 피라미드 상법 업체는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해 세뇌를 주요 수단으로 사용한다. 비슷한 내용과 논리를 계속 들려주고 설득하면,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의심하게 된다.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 등으로 생각이 넘어간다. 인간은 같은 일이 반복되면 자신도 모르게 끌려들어가며 동조하게 된다. ‘폭스뉴스’를 최고 시청률의 뉴스 채널로 만든 로저 에일스의 행적을 다룬 <라우디스트 보이스>라는 드라마가 있다. 공화당의 킹 메이커였던 로저 에일스는 팩트가 부족하거나 증거가 전혀 없을 때도 반복해서 의혹을 제기하기만 하면 결국 사람들이 믿게 된다고 주장한다.

‘폭스뉴스’는 당선된 오바마 정부를 치열하게 공격한다. 정부 지원금을 받는 시민단체가 있었다. 로저 에일스는 말한다. “1루에서 에이콘 문제를 다뤄, 그러면 2루에서는 다들 그 이야기를 하게 되지. 3루에 가면 ‘뉴욕타임스’ 같은 권위지도 시작해. 다들 관심이 있으니 사실이든 아니든 다룰 수밖에 없지.” 가짜뉴스였고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논란을 떠들어대자 결국 의회에서는 지원금을 삭감하게 된다. “이기려면 골수 지지층을 유지해야 해. 계속 붙들어 둬야지. 간단한 논지를 잡아서 그걸 계속 반복하는 거야. 그러다 보면 그 주장이 사람들 마음속에서 친숙한 사실이 되지.”

로저 에일스가 ‘폭스뉴스’를 성공시킨 야비한 전략은 지금 가짜뉴스를 양산하는 극우 유튜버들이 반복하고 있다. 아니 극우 유튜버만이 아니라 한국의 수많은 올드 미디어 역시 자행하는 수법이기도 하다. 진영 논리나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팩트만 공개하고, 공격하거나 비난받을 대상을 교묘하게 제시하는 것. 지금 시대에서 뉴 미디어와 올드 미디어의 ‘윤리의식’은 큰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극우 유튜버의 행태는 올드 미디어가 걸어온 길을 더욱 선정적이고 비열하게 확장시킨 정도 아닐까.

“각본을 써서라도, 내 편을 만들기 위한 말을 해야지. 그들은 정보를 원하는 게 아니야, 기분을 원하는 거지.” 로저 에일스의 말은 매우 뼈아프지만, 진실이다.

경향신문

김봉석 문화평론가


김봉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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