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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4 (화)

[신병주의역사저널] 연산군이 탄핵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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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청망청 어원 만들어낸 연산군의 사치·향락

“풀 한 포기도 모두 내 것” 독재·폭정 정당화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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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은 강추위만큼이나 정치권과 국민을 얼어붙게 한 큰 사건들이 이어졌다. 3일의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6시간 만의 해제, 14일의 대통령 탄핵 국회 의결 등 정국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이제 대통령 탄핵 결정은 헌법재판소로 넘어갔다.

조선시대에도 왕이 쫓겨나는 상황이 두 차례 벌어졌다. 1506년의 중종반정과 1623년의 인조반정이 그것으로, 연산군과 광해군은 조선시대판 탄핵당한 왕이 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은 연산군(燕山君:1476~1506, 재위 1494~1506)의 독재정치가 극에 달한 시점에서 이를 종식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재위 기간 내내 폭정을 일삼던 연산군의 독재정치는 점차 위험 수위에 달하고 있었다. 궁궐의 관리들에게 ‘신언패(愼言牌)’라는 패를 차고 다니게 하였다. 신언패에 새긴 내용은 “입은 화의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간직하면 몸이 편안하여 어디서나 안전하리라”라는 섬뜩한 문구를 적게 하였다. 한마디로 보고 들은 것을 입으로 전하면 죽는다는 경고였다. “우리 임금은 신하를 파리 죽이듯 하고 여색에 절도라고는 없다”라는 한글 익명서가 올라오자, 한글을 폐지하고 한글로 간행된 서적을 불태울 것을 지시했다.

1506년에는 조정의 관리들에게 머리에 쓰는 사모(紗帽)의 앞쪽엔 충(忠)자, 뒤쪽엔 성(誠)자를 새기게 하여 자신에 대해 충성 다짐을 하게 하였다. 한 해의 세금도 버거워하던 백성들에게 2, 3년치 세금을 미리 받는가 하면 각종 명목의 세금을 부과해 백성의 부담을 크게 했다. 자신의 사냥터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근 민가를 철거시키기도 했다. 국정은 제쳐 놓고 전국에서 뽑은 기생인 흥청들과 함께 경복궁 경회루 등에서 사치와 향락을 즐겼다. 이를 한탄한 백성들은 ‘흥청망청(興淸亡淸)’이라는 말로 조롱했고, 이 말은 지금에도 유행하고 있다.

연산군의 폭정에는 흥청 출신으로 후궁의 지위에까지 오른 장녹수(張綠水)의 국정농단도 한몫을 하였다.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같이 하였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하였다. 왕이 비록 몹시 노했더라도 장녹수만 보면 반드시 기뻐하여 웃었으므로, 상을 주고 벌을 주는 일이 모두 그의 입에 달렸다”거나, “(연산군이) 장녹수에게 빠져 날로 방탕이 심해지고 또한 광폭한 짓이 많았다”는 기록은 연산군의 총애 속에 장녹수가 막강한 권력을 가졌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연산군은 폐위되기 직전까지 “조선은 왕의 나라다. 조선의 백성 모두가 왕의 신하요, 조선 땅의 풀 한 포기까지도 모두 내 것이다”라고 할 만큼 독재와 폭정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자주 하였다.

연산군의 폭정에 한계를 느꼈던 인사들은 비밀리에 회합을 거듭하면서 왕을 폐위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해 나갔다. 1506년 9월2일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이 중심이 되어 연산군을 축출하고, 그의 이복동생 진성대군을 중종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조선시대 왕을 탄핵한 첫 사건이었다. 연산군은 교동도(喬桐島)에 유배된 후 가시나무 울타리에 갇혔고, 두 달 만인 1506년 11월 역질(疫疾)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1623년에는 광해군을 폐위하는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조선에서는 두 차례 왕을 탄핵하는 역사를 만들어 갔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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