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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5 (수)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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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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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 | 철학자





‘캐릭터’라는 외래어는 오늘날 매우 다양하게 쓰인다. 국어사전에도 그 용도를 세가지로 구분한다. 캐릭터는, 첫째 소설이나 연극 따위에 등장하는 인물 또는 그 인물의 성격, 둘째 독특한 인물이나 동물의 모습 등을 디자인에 도입한 것. 셋째 알파벳 같은 문자와 문장부호 등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각기 달라 보이는 의미들도 그 말의 유래를 살펴보면 서로 연관 있음을 알 수 있다. 캐릭터(character)는 ‘새기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카라세인’(charassein)에서 유래한다. 명사 ‘카락테르’는 새겨진 글자, 표식, 각인 등을 의미했다. 기원전 5~6세기 그리스 연극의 전성기에 카락테르는 인간을 묘사하는 말로 활용되었는데, 사람의 얼굴이나 신체에 ‘새겨진’ 특징을 가리켰지만 아직 성격, 개성 등의 의미는 아니었다.



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제자였던 테오프라스토스는 스승과 마찬가지로 ‘인간 행위의 특징적 표지’에 관심을 가졌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사람의 행위는 외부로 작용하는 내적 과정의 표현이며, 모든 극(劇)은 이런 행위의 모방이다. 그래서 테오프라스토스는 인간 행위에 드러난 특징을 파악하여 ‘성격의 유형들’을 탐구했다. 그와 동시대 극작가인 메난드로스는 극 중 등장인물의 성격에 카락테르의 개념을 적용했다. 언급한 사전의 첫번째 정의에 해당하는 의미로서의 단어 활용이 시작된 것이다.



캐릭터의 다양한 의미들이 그 뿌리에서부터 어떤 연관이 있는지 살펴보았는데, 인문적 관심은 역시 첫번째 의미에 있다. 캐릭터는 소설, 연극같이 이야기의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인데, 현실의 세계에서도 삶의 기본 요소이기 때문이다. 일상 현실의 시공간에서도 수많은 사건들과 이야기들이 전개되며 다양한 캐릭터들이 활동한다.



캐릭터가 존재하려면 만들어져야 한다. ‘캐릭터 만들기’(character building)는 허구의 세계는 물론 실제 세계에도 있다. 그래서 연출가이자 배우인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의 캐릭터 만들기 또는 성격화(characterization)에 관한 이론과 실습은 연기 분야뿐만 아니라, 인문적 성찰에도 영감을 준다.



스타니슬랍스키는 배우에게 연기의 기초는 “어떤 인물을 준비해서 그 안에 자신을 감추는 것”이라고 한다. 그에게 성격화 작업은 배우 자신을 숨겨주는 가면을 만드는 일이다. ‘역할이라는 가면’을 쓰고 배우는 부끄럼 없이 자아의 속성 가운데에서 그 캐릭터에 맞는 것들을 전적으로 투영한다. “그렇게 가면을 쓴 모습으로 ‘배우-인간’은 자신의 가장 내밀하고 생생한 정신적 세부 사항을 드러낼 수 있다.”



일상 현실에서도 사람들은 성격화 작업을 한다. 흔히 ‘성격은 고칠 수 없다’고 하지만, 이는 성격을 본성 또는 천성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사실 본성은 제대로 알 수 없다. 그것은 조물주의 계획서를 들여다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성격은 상당수 구성된다. 원만한 성격, 똑 부러지는 성격, 모범생 같은 성격, 헤픈 성격 등, 각 개인마다 자기 인생에서 교육, 직업, 사건의 경험 등 여러가지 이유로 형성된 것이다.



각 개인의 캐릭터에는 수동적으로 형성된 성격 요소도 있지만,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성격 요소도 있다. 후자의 경우 대개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며 성격화 작업을 한다. 예를 들어, 솔직한, 용감한, 냉철한 사람이라는 캐릭터가 그렇다. 특히 정치인처럼 공적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긍정 요소로 캐릭터를 구성하고 그것에 몰입한다. 곧 ‘자아의 가면’을 만든다. 그럼으로써 캐릭터화된 자아에 전적으로 맞추어가며 ‘연기’를 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캐릭터를 심화할수록 좋은 연극’과 달리 ‘현실에서 캐릭터 만들기’는 부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자신의 자아를 어떤 하나의 캐릭터로 환원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아 발현의 다양한 가능성을 축소시키는 것이자 잠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데에 한계를 긋는 일이 된다. 냉철한 캐릭터는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냉철히 행동하려 한다. 더구나 도덕적 가치로 구성된 캐릭터는 겉보기에 ‘좋고 아름답기’ 때문에 특별한 나르시시즘을 키운다. 이는 자기 성찰에 걸림돌이 되는데, 반성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볼 때 캐릭터의 가면만을 자꾸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 연관해 쉬운 예를 들면, 지금 나라를 경악과 혼란에 빠뜨린 계엄령의 주인공이 그렇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정계에 들어왔을 때, 소신, 강골, 카리스마라는 캐릭터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인식하지 않거나 못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이런 칼럼을 기고했다. “소신을 위한 소신, 강골을 위한 강골, 곧 소신과 강골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로 여기는 캐릭터일수록 나르시시즘의 정도가 높고 허영심의 수위도 올라간다. 그래서 ‘결단을 위한 결단’ 또한 하게 된다.”



그는 정치 경험이 없어 수많은 조언을 무분별하게 수용할 가능성 또한 높았다. 나는 “분별없이 수용한 조언과 결단을 위한 결단의 의지가 결합하면, 사달이 날 수 있다”고 했다. ‘캐릭터 탄력성’을 가지라고도 했다. “자신의 캐릭터를 상수로 고정하지 말아야 한다. 소신, 강골, 결단의 캐릭터를 바꾸고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선거에는 캐릭터 확립이 유용하지만, 국정 운영에는 캐릭터 탄력성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소신이 맹신과 아집이 되고, 강골이 탄압의 무기가 되며, 카리스마가 무능력의 위장술이 되어버린 사고 현장을 보고 있다.



작가 헨리 제임스는 ‘소설의 기법’에서 “캐릭터란 사건을 결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고, 사건이란 캐릭터를 드러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라고 했다. 이 명제는 우리 현실에도 전용된다. 집권자의 캐릭터가 사고를 치는 데 결정적이었고, 사고는 그 캐릭터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현대 정치사상가들은 훌륭한 위정자를 뽑는 일보다, 뽑힌 위정자를 감시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함을 역설해왔다. 그러나 국정의 키잡이가 될 사람의 캐릭터를 면밀히 관찰하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다. 미국의 2대 대통령 존 애덤스는 “통치자의 캐릭터와 행동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 국민의 자유를 보존할 수 없다”고 했다. 정치는 사람이 하는 일이다. 사람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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