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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 (목)

숫눈을 밟은 당신에게 [달곰한 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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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욕설과 외계어가 날뛰는 세상. 두런두런 이야기하듯 곱고 바른 우리말을 알리려 합니다. 우리말 이야기에서 따뜻한 위로를 받는 행복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한국일보

그 누구도 밟지 않은, 쌓인 그대로의 깨끗한 숫눈. 두 눈을 감고 사뿐히 눈 위에 서 본다. 꿈처럼 환상처럼. 왕태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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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발로 숫눈을 밟은 당신에게. 오른발로 숫눈을 밟은 당신에게. 회사 후배 봉주연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속 제목이다. 1·2부로 나뉜 시집은 숫눈을 밟은 발로 시작된다. 그 누구도 밟지 않은, 쌓인 그대로의 깨끗한 숫눈. 시인의 마음을 읽고 싶어 눈을 감았다. 잿빛 하늘이 무겁게 내려오더니 하얀 눈송이가 온 세상에 얌전히 내려앉았다. 두꺼운 외투를 벗고 눈 덮인 벌판 위에 사뿐히 섰다. 왼발부터. 꿈처럼 환상처럼.

보고 싶은 사람을 떠올릴 때 눈만 한 게 없다. 삶의 더께를 걷어내고 순수했던 시절로 돌아가는 데도 눈만 한 게 없다. 그러고 보니 혼자 외로이 내리는 눈은 없다. 설움 그리움 설렘 기쁨과 손잡고 먼 하늘에서 찬찬히 걸어온다. 눈의 생김새와 온도가 제각각인 이유다. 때론 싸늘하게 때론 따스하게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미운 눈도 덮이고 고운 눈도 쌓인다. 국어사전엔 눈 관련 낱말이 30개가량 올라 있다.

진눈깨비는 비가 섞여 내리는 눈이다. 비도 못 되고 눈도 못 됐다. 비와 눈 사이에서 서성대는 몸짓이 안쓰럽다. 함박눈을 잔뜩 기대한 이들은 진눈깨비를 만나면 속상해한다. 큰 박꽃같이 탐스러운 눈을 바랐으니 그럴 만도 하다. 밤사이 몰래 내린 도둑(도적)눈은 일찍 잠든 이들에게 즐거운 아침을 선사한다. 이날 새벽길을 나서면 햇살에 반짝이는 숫눈을 밟을 수도 있다. 그 누구도 지나가지 않은 숫눈길이다.

한 길이나 될 만큼 쌓이는 눈은 길눈, 잣눈이다. 이런 날엔 호젓한 길을 걸을 수 있다. 눈 사이로 뚫린 눈구멍길이다. 동화 같은 세상엔 복눈도 등장한다. 지붕 위에도 나뭇가지에도 소담스러운 눈이 올라앉아 있다. 발자국이 겨우 날 만큼 적게 내리는 눈도 있다. 자국눈이다. 가랑비처럼 잘게 내리는 눈은 가랑눈. 그보다 조금 더 크고 성기게 내리면 포슬눈이다. 포슬눈은 뭉쳐지지 않아 아이들도 연인들도 눈싸움을 하진 못한다. 물기가 적어 엉기지 않고 바스러지는 모양이 '포슬포슬'이다. 쌀이 땅에 뿌려지듯 내리는 눈은 싸라기눈이다. 줄여서 싸락눈이라고도 한다.

"너무 빨리 걷지 말고 살살~ 천천히, 옆도 보고 뒤도 보고~" 누군가의 걱정에 주변을 돌아봤다. 모처럼 찾은 강원도 산골. 쫄쫄쫄. 쌓인 눈 틈에서 물이 새어 나온다. 배가 불룩하니 인심 좋게 생긴 눈사람 발에서도 물이 흐른다. 눈이 녹아 눈 속에서 흐르는 눈석임물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보니 2025년이 눈앞이다. 햇살 머금은 숫눈처럼 반짝이는 새해를 맞으시라. 독자 여러분, 건강한 모습으로 내년에 만나요.

한국일보

노경아 교열팀장 jsjys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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