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구 기자(hilltop@pressian.com)]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26일 "여야가 합의해 안(案)을 제출할 때까지 저는 헌법재판관 임명을 보류하겠다"며 헌법재판관 후보자 3인에 대한 임명을 거부했다. 여야 갈등을 핑계로 6명의 헌법재판관 체제로 운영되고 있는 현재의 불완전한 헌재 상태를 유지하겠다는 의미다. 여야 갈등에 중립적인 태도를 가장해 사실상 헌법재판관 임명에 반대하는 국민의힘 주장에 힘을 실은 것으로, 국정 위기 속에도 자신에 대한 야당의 탄핵소추를 유발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한 대행은 이날 긴급 대국민담화를 통해 "여야가 합의해 안을 제출하면 즉시 헌법재판관을 임명하겠다"며 이같이 밝혔다. 다만 이는 여야 간 합의가 거의 불가능한 사안이어서 무책임한 결정 회피, 책임 떠넘기기라는 평가다.
한 대행은 자신이 맡은 권한대행의 역할에 대해서도 소극적으로 해석했다. 그는 "대통령 권한대행은 나라가 위기를 넘길 수 있도록 안정적인 국정 운영에 전념하되, 헌법기관 임명을 포함한 대통령의 중대한 고유 권한 행사는 자제하라는 것이 우리 헌법과 법률에 담긴 일관된 정신"이라고 했다. 또 "만약 불가피하게 이런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면 국민의 대표인 국회에서 여야 합의가 먼저 이루어지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 헌정사에서 단 한 번도 깨진 적 없는 관례"라고 했다.
그는 "대통령 권한대행이 대통령의 중대한 고유 권한을 행사하기에 앞서 여야가 합의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법리 해석이 엇갈리고 분열과 갈등이 극심하지만 시간을 들여 사법적 판단을 기다릴만한 여유가 없을 때 국민의 대표인 여야의 합의야말로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국민의 통합을 이끌어낼 수 있는 마지막 둑이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그러나 이같은 발언과 행동은 지난 19일 임시국무회의를 통해 여야가 첨예하게 맞선 양곡관리법 등 6개 법안에 대해 대통령 고유 권한인 재의요구권(거부권)을 거침없이 행사했던 것과는 온도차가 크다.
한 대행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소추 당시 황교안 당시 권한대행의 행보까지 선례로 들며 "헌재의 탄핵심판 결정에 영향을 주는 임명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헌재 결정 전에는 헌법재판관 임명을 하지 않았고 헌재 결정이 나온 뒤 임명했다"고도 했다.
여야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윤석열 대통령 탄핵 여부에 대한 헌재 결정이 나올 때까지 헌법재판관 임명을 미루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또 야당이 자신을 탄핵하더라도 '권한대행의 권한대행 체제'는 헌법재판관 임명에 한층 가중된 부담을 갖게 될 것이라는 계산도 엿보인다.
이날 한 대행은 "헌법재판관 임명 문제에 대해 제가 가진 고민을 가감 없이 말씀드리고자 이 자리에 섰다"며 거듭 공을 국회로 떠넘기고 책임 회피로 일관했다.
한 대행은 "사태의 조속한 수습과 안정된 국정 운영을 위해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중대한 사안 중 하나가 헌법재판소 재판관 충원이라는 데 이견을 가질 분은 거의 안 계실 것이다. 국민이 분노하고 있는데 그냥 임명하면 되지 뭐가 문제냐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다"면서도 "다만 이 문제는 안타깝게도 그렇게 쉽게 답을 정할 수 없다는 것이 저의 고민"이라고 했다.
그는 거듭 "제가 무엇보다 무겁게 느끼는 의무는 대통령 권한대행이 여야의 정치적 합의 없는 정치적 결단을 내리는 것이 과연 우리 헌정 질서에 부합하는가 하는 것"이라며 "이런 고민에 제대로 답을 찾지 않고 결론을 내라는 말씀에 동의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또 "제대로 답을 찾는 것이 반드시 오랜 시간을 요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도 임명 여부 판단에 필요한 시간과 마지노선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는 "특히 지금은 국가의 운명과 역사를 결정하는 공정한 재판이 헌법재판관에 달려 있는 시점"이라며 "헌법재판소의 구성과 헌법재판관 임명에 대해 합리적인 국민이 이견 없이 수용할 수 있는 현명한 해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한 대행은 또 "헌법재판관 충원에 대해 여야는 불과 한 달 전까지 지금과 다른 입장을 취했고 이 순간에도 정반대로 대립하고 있다"고 했다.
특히 "이런 상황에서 야당은 여야 합의 없이 헌법기관 임명이라는 대통령의 고유권한을 행사하라고 대통령 권한대행을 압박하고 있다"며 자신에 대한 야당의 탄핵소추 추진에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그러면서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가는 자칫 불가피한 비상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 한, 대통령 권한대행은 대통령의 고유권한 행사를 자제하고 안정된 국정운영에만 전념하라는 우리 헌정 질서의 또 다른 기본 원칙마저 훼손될 우려가 있다"고 했다.
한 대행은 또 "이념 대립으로 많은 비극을 겪은 우리나라지만 그래도 언제나 우리 곁에는 진영의 유불리를 넘어 나라 전체를 생각하는 정치인들이 계셨다"면서 "정치로 풀어야 할 일을 정치로 풀어주시는 큰 어른들이 계셨기에 우리가 이만큼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원식 국회의장, 권영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지명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포함한 여야 정치인들이 반드시 그런 리더십을 보여줄 것이고 또 보여줘야 한다고 저는 굳게 믿고 있다"고 했다.
한 대행은 야당의 탄핵소추를 의식한 듯 "저는 오로지 국민을 바라보며 헌법과 법률에 따라 국가 미래를 위해 판단할 뿐, 개인의 거취나 영역은 하등 중요하지 않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 대행이 이날 대국민담화를 통해 헌법재판관 임명 불가 방침을 분명히 하자, 더불어민주당은 한 대행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이날 바로 국회에 발의하고 27일 본회의에서 처리키로 했다.
박찬대 원내대표는 "민주당은 한 총리 탄핵안을 즉시 발의하고 본회의에서 보고하게 할 것"이라고 했다 탄핵안은 본회의 보고 시점부터 24시간 이후 72시간 이내에 표결하게 된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26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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