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 마감 처리 등 실제와 흡사하게 제작 요청
국방부 "정보사 매년 훈련용 인민군복 구매했어"
남파 간첩이 인민군복 입고 활동하겠냐는 의견도
HID 부대명 임무 낱낱히 공개되며 활동 위축 우려
편집자주
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문상호 국군정보사령관이 20일 서울 용산구 중앙지역군사법원에서 열리는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는 모습.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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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남파 간첩을 보낼 때 인민군복을 입고 내려올까요?"
국방정보본부에서 고위직을 맡았던 인사는 정보사령부가 12·3 불법 계엄을 앞두고 인민군복을 구입했다는 의혹에 대한 질문을 하자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영화라면 몰라도 버젓이 인민군복을 입고 활동할 간첩이 어디 있겠냐는 겁니다. 이 인사는 "북한에서도 공작임무를 하려면 대한민국 군복을 구하려고 하지 않겠나.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인민군복 논란이 벌어진 이유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할 당시 국군정보사령부 산하 특수임무대(HID)가 투입됐기 때문입니다. 공조수사본부는 HID 요원들이 주요 정치인 체포조로 동원됐다는 의혹을 수사 중입니다. 직무가 정지된 문상호 정보사령관은 10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HID 요원 투입과 관련한 질문을 받자 "(판교에) 특수 인원 5명 포함, 30여 명을 대기시켰다"고 답했습니다.
이에 더해 이상한 정황이 포착됐습니다. 계엄 사태 3주 전 정보사에 인민군복 60벌이 납품된 것입니다. 국방전자조달시스템에 따르면 정보사는 지난 7월 24일 HID 부대용으로 사용할 것으로 알려진 '훈련영화피복 제조' 입찰 공고를 긴급소요로 올렸습니다.
첨부된 사양서를 보면 북한 인민군 계급 체계에 맞는 전투복 상하의와 전투모의 요구 정보가 구체적으로 담겼습니다. 장교를 뜻하는 군관과 일반 병사를 뜻하는 하전사의 전투복 견본품 사진을 올렸고 이와 유사하게 구현해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심지어 원단 소재와 봉제나 마감 처리 방식, 주머니와 소매부리의 위치와 개수 등도 자세하게 명시해두는 등 실제 인민군복과 최대한 똑같이 제작하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 아냐?" 현실로 나온 HID
정보사의 7월 국방전자조달시스템에 올린 '인민군복' 입찰 공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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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D의 존재는 영화 '실미도'를 계기로 대중에 강렬하게 각인됐습니다. 1968년 1월 북한 무장공비가 남한에 침투한 '김신조 사건' 이후 창설한 실미도 684부대를 다룬 영화입니다. 실제 당시 정부는 '김일성의 목을 따겠다'며 여러 북파 공작부대들을 창설했고 이후 이를 통·폐합해 ‘설악개발단’이라는 부대도 만들었습니다. 과거 HID는 육군본부 소속 부대였으나 현재는 육해공군 첩보부대 모두 국방정보본부 산하 정보사 예하로 통합돼 있습니다.
정보사는 군내에서도 어떤 임무를 하는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은밀한 조직입니다. 그러니 비밀리에 활동해온 북파 공작부대 HID가 메인 뉴스를 장식하는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었습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정부는 북파 공작원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을 정도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정보사가 HID 부대용으로 인민군복을 구매한 사실이 확인됐으니 야당에서는 '북풍 공작'을 의심하는 것이 당연해 보입니다. 계엄 발동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HID 요원들이 인민군복을 입고 사회를 혼란시키려고 했던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방송인 김어준씨가 불을 지폈습니다. 계엄 당시 군 암살조가 한동훈 국민의힘 당대표를 체포해 사살한 뒤 북한군 소행으로 위장하려고 했다는 제보를 받았다고 13일 국회에 나와 주장했습니다. 특정 장소에 북한 군복을 매립하고 일정 시점 후에 군복을 발견한 뒤 북한군 소행으로 발표한다는 것입니다.
"매년 북한군복 구입"
방송인 김어준씨가 13일 국회 과방위에서 열린 12.3 비상계엄 관련 현안질의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체포되어 이송되는 한동훈을 사살한다”는 제보 내용을 밝히고 있다. 고영권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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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야당도 이 같은 인민군복 의혹을 더 이상 키우고 있지는 않습니다. 현재 정보사에서는 인민군복을 입고 훈련을 하거나 여러 임무수행을 위해 여분의 인민군복을 구비해둔 상태입니다. 부승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0일 국회 국방위에서 문 사령관에게 질의를 하면서 “내가 (군 시절) 공작대장 했었다. 실제 HID 갔다 왔고 DMZ 돌파 훈련할 때 갔다 왔다. 초소부터 인민군 복장을 입는다”며 “약간 소요. 이쪽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국방부에서 예산을 담당하는 관계자도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정보사는 매년 (인민군복) 그 정도 예산을 편성했고 집행해 왔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관계자는 "(계엄 같은) 기획을 위해 구매할 거였으면 그렇게 대놓고 입찰공고를 올렸겠나"면서 "긴급소요로 제기한 것은 올해가 넘어가면 예산이 불용되기 때문에 연내 집행을 위해 그렇게 올린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정보사뿐만 아니라 과학화전투훈련단(KCTC)에서도 인민군복이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전문대항군 연대 인원용으로 인민군복을 구매해두고 훈련 때 입기도 합니다. 일각에서는 입찰공고에 나온 금액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 집행된 것을 두고 의구심을 표하기도 하지만 국방부 관계자는 "일반 전투복은 업체들이 많지만 이런 특수한 전투복을 만드는 업체는 많지 않아 가격을 몇 배 이상 높게 부르기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사령부 수준의 부대는 2024년에 사용할 예산을 2022년 말에는 제출해야 합니다. 이를 각군본부가 종합해 2023년 3월에 올리면 국방부가 4월쯤 다시 기획재정부에 넘기고 기재부는 각 부처의 예산을 따져본 뒤 8월에 편성해 국회에 제출하는 식입니다. 따라서 계엄을 위해 2년 전부터 인민군복을 위한 예산을 편성해 제출했다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다만 이런 인민군복 논란이 증폭된 배경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법계엄의 기획자로 꼽히는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수첩에는 '북방한계선(NLL)에서 북한의 공격을 유도하고 북측의 전쟁을 유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계엄 발동을 위해 북풍을 기획했던 정황으로 의심되는 대목입니다.
비상계엄이 낳은 후과
여기에 핵심 역할을 한 정보사는 앞으로도 인민군복 논란처럼 각종 의혹에 휩싸일 가능성이 큽니다. 전직 국방부 장성은 "정보사와 HID가 계엄에 가담한 부대가 됐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특히 정보사의 일부 부대는 비밀리에 위법과 합법 사이에 있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데 계엄군 낙인이 찍혔는데 이제 무슨 임무를 수행하겠나"고 말했습니다.
고작 6시간 만에 해제됐다고는 하나, 45년 만에 선포한 비상계엄에 따른 후폭풍이 만만치 않은 상황입니다. 정보사가 원흉으로 낙인 찍혀 앞으로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북한이 향후 도발 수위를 높이더라도 강경대응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국민들이 북한의 도발이 아닌 남한의 도발을 걱정하게 된다면 군이 필요에 따라 경계태세를 격상하거나 훈련 등을 위해 부대가 이동하는 통상적인 활동마저 위축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즉·강·끝'(즉시, 강력하게, 끝까지)이라는 구호를 외치던 군 당국자들도 그동안 옳다고 생각한 방향이 계엄을 위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12·12 군사반란 이후 암적인 존재로 확인된 하나회를 청산하고 정치적 중립을 지키려고 했던 군의 노력이 하룻밤 사이에 물거품이 됐기 때문입니다. 무너진 신뢰를 다시 쌓아올리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요. 현재로서는 가늠하기조차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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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현모 기자 nine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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