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장애인 등 약자와의 연대에 앞장서
신경아 "이들의 행동력, 이젠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장혜영 "다가올 대선은 이들의 목소리 대변해야"
24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 앞에서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로 열린 메리퇴진 크리스마스 민주주의 응원봉 콘서트-다시 만들 세계에서 시민들이 손팻말과 응원봉을 들고 있다. 뉴시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씨로 기록된 지난 21일 밤, 서울 서초구 남태령 고개를 차벽으로 막아선 경찰이 트랙터 유리를 부수고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소속 농민들을 강제로 끌어내리는 모습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유되자마자 가장 먼저 현장으로 달려온 이들이 있었다. 응원봉을 손에 쥔 2030 청년 여성들이었다.
경찰과 트랙터가 '밤샘 대치'를 하는 동안, 시민 발언대 위에선 여성 이슈뿐 아니라, 장애인, 성소수자, 청소년, 노동자, 팔레스타인 이슈에 이르기까지 연령·성별·계급·국경을 초월한 약자들의 의제가 두루두루 다뤄졌다. 그 결과, 21일 밤 ‘차 빼라’로 시작된 구호는 22일 오후 마침내 차벽을 몰아내며 이렇게 진화했다.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남태령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체포·구속 농민행진 보장촉구 시민대회'에서 트랙터 이동을 통제하던 경찰 버스가 철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22일 오후 전농의 트랙터 행렬이 최종 목적지였던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에 도착하며 집회는 평화롭게 마무리됐다. 그러나 이날의 밤샘 집회가 지핀 행동의 열기는 아직까지 꺼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남태령에서 시작된 청년 여성과 농민들의 연대가 또 다른 약자와의 연대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일주일간 사회 전방위로 확대된 이 연대 행렬의 과정과 의미를 들여다봤다.
그날 남태령엔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광장'이 차려졌다
21~22일 남태령 집회 현장의 발언대는 '모두에게 열려 있는 무대'였다. 성소수자, 이주민, 여성 농부, 노동운동가, 비정규직 노동자, 도시빈민, 학교 밖 청소년 등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이 밤새 마이크를 잡았다. 발언대에 오른 시민들은 △2015년 11월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고 사망한 고(故) 백남기 농민 △2020년 성확정수술을 받은 뒤 육군 강제 전역 처분을 당하고 이듬해 세상을 떠난 고 변희수 하사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의 피해자 △2022년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차례로 호명하며 발언을 이어 나갔다.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남태령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체포·구속 농민행진 보장촉구 시민대회'에서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봉준 투쟁단 및 시민들이 구호가 적힌 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현장에선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기 위한 암묵적 규칙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날 엑스(X)에는 한 농민이 "우리 딸들 수고했다"고 외치자, 스스로를 '논바이너리(자신의 성별을 이분법적으로 규정하지 않는 퀴어 집단)'로 정의하는 시민들이 "사실 저흰 딸이 아니다"라고 답했고, 이에 대해 농민이 "그렇구나, 알아두겠다"고 응수했다는 사연이 300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공유됐다. 사연을 쓴 누리꾼은 "모르는 이로부터 정체성을 부정당하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 감동적이었다"고 밝혔다. 이후 집회 현장 분위기를 전하는 게시물에선 ‘남녀노소’라는 표현 대신 ‘젠더노소’라는 표현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젊은 여성들은 농민운동가요 가사를 ‘형제들이여’에서 ‘우리들이여’로 바꿔 부르고, 중노년의 농민들은 ‘다시 만난 세계’를 배우고 있다" "모두의 조건 없는 연대 속에서 농민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등의 후기가 실시간으로 쏟아졌다.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남태령역으로 모여들고 있는 시민들. 엑스(X)캡처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연행될까 걱정된다" 농민들 염려에 "잘못한 게 없으니 무섭지 않다" 응수한 청년 여성들
22일 오전부터 현장을 지켰던 장혜영 전 정의당 의원은 "청년 여성들이 열어낸 광장이 실시간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목도한 놀라운 순간이었다"며 "다양한 약자 집단이 서로의 정체성과 의제를 스펀지처럼 흡수하면서 강력한 정치적 에너지를 만들어낸 장면이기도 했다"고 평가했다.
장 전 의원은 "한 농민 운동가가 응원봉을 든 채 경찰에 거세게 항의하고 있는 청년 여성에게 ‘그러다 잡혀갈지도 모르는데 무섭지도 않느냐’고 물었더니, 천연덕스럽게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연행이 돼요?’라고 되묻는 것을 듣고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더라"면서 "위축되지 않는 청년 여성들의 에너지가 농민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돌파력을 제공한 것 같다"고 했다.
21일~22일 사이 남태령역에 쏟아진 기부 물품들. 엑스(X)캡처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런 돌파의 에너지는 남태령 바깥에서 안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현장에 함께하지 못한 시민들은 전농의 유튜브 라이브 영상을 지켜보며 난방용 버스를 대절해 보내고, 물과 음식, 핫팩과 담요, 의약품과 생리대 등을 현장으로 배달시켰다.
집회가 해산된 이후 현장에 남은 기부 물품들 중 일부는 여성 노숙자들을 돌보는 시민단체 열린복지디딤돌센터에 기부됐다. 누리꾼들은 이 사연을 ‘용두용미’라고 소개하며 널리 공유했다.
"남태령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사회 각 곳으로 번진 연대 행렬
남태령 집회를 기점으로 2030 청년 여성들의 행동력은 다른 사회적 소수자들을 향한 후원과 지지로 이어졌다. ‘경찰로부터 트랙터 군단을 지켜냈다’는 정치적 효능감이 다른 약자 집단과 연대하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진 것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안국역에서 출근길 승강장 다이인(die-in) 행동을 진행한 참가자들이 바닥에 눕는 퍼포먼스를 실시하고 있다. 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연대는 후원이나 기부에 그치지 않고 직접적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24일 서울지하철 3호선 안국역 승강장에서 열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다이인(die-in, 죽은 듯 누워 있는 시위 방식) 행동에는 300여 명의 비장애인 시민들이 몰려왔다. 온라인을 중심으로 “남태령처럼 서울교통공사의 장애인 강제퇴거 역시 우리가 연대하면 뚫을 수 있다”는 내용의 독려가 순식간에 퍼진 결과였다.
지난 3년 동안 전장연 활동가들이 주기적으로 벌인 이 시위는 서울교통공사의 강제퇴거 조치에 번번이 막혔었다. 이례적인 풍경 앞에 박경석 전장연 대표는 "이젠 외롭지 않다"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같은 날 엑스(X)에는 전국의 집회, 시위 일정을 한 번에 모아 보여주는 홈페이지 주소가 공유되기도 했다.
신경아 교수 "각성한 2030 청년 여성들의 행동력, 이젠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금껏 광장에서 이 정도로 비주류의 목소리가 크게 터져 나온 적은 없었다"며 "박근혜 탄핵 정국 당시 정권 교체가 아닌 의제들은 모두 ‘나중’으로 밀린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박근혜 정권 이후 바뀐 정권에서 기대했던 만큼의 변화를 경험하지 못했고, 윤석열 정권에 이르러선 오히려 퇴보하는 것을 보며 ‘이래선 안 된다’는 것을 학습한 결과"라며 "진정한 민주주의란 단순히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 아닌, 광장의 목소리를 현실 정치에 반영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성숙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왔다고 볼 수 있다. 고무적이다"라고 덧붙였다.
21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 동십자각 인근에서 '윤석열 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로 열린 범시민 대행진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청년 여성들의 정치적 각성의 흔적은 온라인에서도 두드러지고 있다. 연대 행렬에 참여하고 있는 누리꾼들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날밤을 새며 새벽 아스팔트 위에서 농성한 경험은 차원이 달랐다. 그 밤을 경험한 이들은 그날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타인을 도울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실감하면서 치유가 되기도 한다", "이번 탄핵 정국은 모든 의제를 쓸어간 것이 아닌 모든 의제가 나뉘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의제들이 밀물처럼 밀려들고 있다" 등의 소회를 남겼다.
21대 국회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주창해 온 장 전 의원은 여야 정치권을 향해 "다가올 대선은 2024년 12월 남태령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선거여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기도 했다. 그는 "2016년의 광장에서 '일단 정권부터 바꾸고 다른 건 나중에'가 다수의 목소리였다면 현재의 광장은 '차별금지법도, 낙태죄 폐지 보완 입법도, 장애인 이동권도 나중이 아닌 지금 당장 해야 한다'는 게 주류의 목소리가 됐다"고 진단하며 "앞으로 정치권은 이 같은 유권자들의 요구에 반드시 제대로 응답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