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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 (화)

독일 정치에 드리운 ‘머스크 리스크’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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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플랫폼 중 하나인 X(옛 트위터)를 인수한 것은 2022년 4월의 일이다. 그로부터 1년 8개월쯤 지난 2023년 12월 미국 경제 매체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머스크의 정치적 영향력이 훨씬 더 커졌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자신과 정치적 견해를 함께하는 사람에게는 사용이 중단된 X 계정을 복원시켜주고, 그렇지 않은 사람의 X 계정 이용은 중단시킬 수 있는 힘을 얻으며 온라인 공간에서 일종의 ‘게이트키퍼’가 됐다는 것이다. 주요국이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전기차 소비를 적극 권장하고 또 우주 공간을 군사적·경제적으로 활용하려는 프로젝트에 경쟁적으로 뛰어드는 점도 머스크의 권력을 키우는 요인이 됐다. 전기차를 만들어 파는 테슬라와 그 자회사인 우주 기업 스페이스X에 대한 세계 각국의 의존도가 부쩍 높아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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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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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스크가 원래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X 인수 시점에 그가 미국 정치에 개입하려는 의사를 지닌 점은 분명해 보인다. 실제로 그가 X의 경영권을 장악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X 계정에 취해진 ‘영구 정지’ 결정을 철회한 것이다. 2020년 11월 미 대선에서 조 바이든 현 대통령에게 패한 트럼프는 선거 결과에 불복하며 이듬해인 2021년 1월6일 지지자들을 선동해 연방의회 의사당을 습격하도록 했다. 이른바 ‘1·6 사태’로 불리는 이 난동 이후 X는 트럼프를 위험 인물로 분류하며 그 계정에 영구 정지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머스크는 이를 “도덕적으로 잘못됐고 완전히 바보 같은 조치였다”며 맹비난했다. 그러면서 X에 대해 “콘텐츠 규제를 철회하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플랫폼을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올해 미 대선을 앞두고 머스크는 아예 트럼프 캠프에 합류했다. 억만장자답게 거액의 선거운동 자금을 기부한 것은 물론 직접 유세에 동행하며 연설도 했다. 덕분에 경쟁자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을 압도적 표차로 누르고 당선된 트럼프는 앞으로 신설될 ‘정부효율부’(DOGE)라는 기관의 수장에 머스크를 내정했다. 그런데 이처럼 부(富)와 권력을 양손에 쥔 머스크의 시야가 점점 더 넓어지는 모습이다. 유럽에 있는 미국의 주요 동맹국들도 트럼프와 유사한 정책을 펴게 만들고 싶어하는 듯하다. 가장 먼저 목표로 삼은 것은 서방에서 미국 다음으로 큰 경제 대국인 독일이다. 머스크는 최근 X에 올린 글에서 사회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를 “무능한 바보”로 규정하며 “즉각 물러나야 한다”고 요구했다. 반면 독일의 유럽연합(EU) 탈퇴, 유로화(貨) 폐기 및 옛 마르크화 부활, 이민자에 대한 강력한 단속 등을 주장하는 극우 성향의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에는 찬사를 바쳤다. 오는 2월23일로 예정된 독일 총선이 채 2개월도 남지 않은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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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27일(현지시간) 대국민 연설을 통해 오는 2월23일로 예정된 총선을 앞둔 정당들의 공정한 선거운동을 당부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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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어느 괴짜 CEO의 영양가 없는 정치 평론쯤으로 여겨 무관심했던 독일 정부도 더는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머스크가 그냥 기업인이 아니고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공적 역할을 맡을 예정임을 감안하면 그의 말을 예사롭게 흘려 듣긴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은 27일 대국민 연설에서 SNS 등 온라인 공간이 정치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에 우려를 표했다. 그러면서 “어느 당에 투표할 것인지는 투표할 자격을 갖춘 독일 시민들만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AfD라는 특정 정당 지지를 선언하고 독일 유권자들을 선동하려는 머스크에게 경고장을 보낸 것으로 풀이된다.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AfD를 포함한 모든 정당들을 향해 “공정하고 투명한 수단으로 선거운동에 임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AfD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약 19%의 지지율을 얻으며 2위를 달리는 중이다. 이대로면 총선에서 원내 제2당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얘기다. 독일 정치에 드리운 ‘머스크 리스크’의 결말이 주목된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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