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
한국의 발전 경험에 관심이 많은 개발도상국 정책 결정자들과 이야기할 때 먼저 한국의 주력 수출상품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보여주면 다들 깊은 인상을 받는다. 1961년 한국의 10대 주력 수출품목은 대부분 무연탄·중석·흑연처럼 천연자원이거나 오징어나 쌀과 같은 농수산물이었다. 놀랍게도 10위에는 돼지털이 있었다. 옷솔이나 구둣솔의 재료로 수출한 것이다.
그러나 불과 20년 후 1980년이 되면, 10위에 반도체가 등장하고, 다시 20년이 지난 2000년에는 반도체가 1위에 오르게 된다. 40년, 즉 대략 한 세대 만에 ‘돼지털’에서 ‘디지털’로 주력산업의 구성을 완전히 탈바꿈한 나라는 지난 100년 동안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산업 현장의 기업가와 엔지니어들, 그리고 묵묵히 실험실을 지켜낸 과학기술자들의 땀과 눈물로 이루어낸 자랑스러운 성과다.
■
성장의 엔진 멈추고 있는 한국
추격형 패러다임 못 벗어난 탓
설상가상 계엄으로 국가 혼돈
패러다임 전면 전환 절실한 때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난 2000년 이후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5년에 1%포인트씩 추세적으로 떨어져, 지금은 거의 1% 안팎 수준에 이르렀다. 놀랍도록 활기차게 돌아가던 성장의 엔진이 서서히 멈추고 있다. 잠재성장률의 추세적 하락은 깊은 원인, 즉 우리 산업이 추격형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다.
‘최초의 질문’과 ‘스케일업의 축적’
지금까지 한국을 성장시킨 추격형 패러다임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중국의 등장 때문이다. 로이터=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한국의 산업과 기술은 70년대 본격적인 발전을 시작한 이래 도입기술·개량기술, 그리고 자체기술의 단계를 밟아가며 집요하게 선진국을 추격해 왔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산업은 자동차에서부터 반도체·휴대폰·첨단 해양플랜트를 넘어 우주발사체를 쏘고, 첨단전투기를 만들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쉽게 말하면, 선진국 산업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상품을 그들과 같은 수준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기에는 일러도 너무 이르다. 무엇보다 선진국의 개념설계를 도입하여 그들과 같은 수준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실행의 단계를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행의 힘, 즉 추격형 패러다임으로 갈 수 있는 최대한의 수준에 이른 것이다. 그것이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다. 이제는 이 실행역량만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우리의 강점이었던 바로 그 탁월한 실행이란 것을 중국이 모든 산업에서 더 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진국에서 제시된 개념설계를 벤치마크 삼아 충실히 실행하는 단계를 넘어선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벤치마크를 제시하는 단계, 즉 우리만의 고유한 개념설계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고유한 개념설계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익숙했던 실행에 기반한 추격전략과는 완전히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 남들이 감히 던지지 못한 도전적인 목표, 즉, 최초의 질문을 내걸고, 시행착오를 축적하면서 조금씩 해답을 만들어나가는 스케일업을 버텨내야 하는 것이다. ‘최초의 질문’과 ‘스케일업의 축적’, 이 두 가지 전략이 고유한 개념설계의 탄생 비밀인데, 하얀 눈밭에 처음 발자국을 딛는 것처럼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길이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의 고소득 국가가 되기까지 열심히 실행하는 추격의 관행으로 달려왔지만, 독창적 개념설계를 제시하는 단계로 전환하지 않는다면, 이제부터는 내려가는 길밖에 없다. 선진국의 문턱에 도달했던 많은 국가들이 이 전환의 고개를 넘지 못하고, 영원한 중진국으로 주저앉은 사례가 수두룩하다. 한국도 과학기술계와 산업계, 나아가 사회 전체가 실행에서 개념설계로 패러다임 전환을 하지 않으면, 지금 누리고 있는 국민소득 3만 달러가 앞으로 다시 없을 피크가 되는 일, 즉 코리아 피크가 현실화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코리아 피크 겪지 않으려면
삼성전자 화성사업장 라인 내 엔지니어 모습. 사진제공=삼성전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나는 지난 몇 년간 기회가 닿는 대로 코리아 피크를 겪지 않으려면 실행에서 개념설계로 우리 산업과 사회의 패러다임을 전면적으로 전환해야 하고, 그를 위해 ‘최초의 질문’과 ‘스케일업의 축적’을 핵심전략으로 삼아야 한다고 간절히 이야기해 왔다. 우리만의 독창적 개념설계가 있을 때만 미·중 패권경쟁이 심해지고 기술보호주의의 파고가 높아질수록, 또한 글로벌 공급망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대체 불가능한 퍼즐로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절실하게 말하고자 노력했다. 작지만 산업계와 과학기술계 이곳저곳에서 공감한다는 반향을 접했고, 전환을 위해 분투하는 여러 가지 노력을 보면서 작은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황당하게도 선진국을 자부하던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계엄이라는 정치적 불확실성이 발생했고,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었다. 치열한 글로벌 기술경쟁에 정부와 산업계, 과학기술계가 중지를 모아도 신통치 않을 판에 사실상 글로벌 전략은 손을 놓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뜬금없는 국가연구개발의 무차별 예산 삭감으로 초토화된 과학기술 생태계를 어떻게 복원해 나가야 할지 고민하던 와중이었지만 그마저도 논의가 올스톱 상태다. 글로벌 선진국의 기업과 과학기술자들은 신경 쓸 필요조차 없는 당혹스러운 정치적 불확실성 때문에, 추격에서 선도로의 대전환과 같은 중장기적인 과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그저 한갓진 방담처럼 들릴 지경이다. 한국의 산업이 쌓아 올린 그간의 노력과 대전환을 위한 몸부림이 무용지물이 되고, 만연 중진국으로 다시 추락하면 어쩌나 모골이 송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리아 피크를 막기 위해서는 한국 산업과 사회의 패러다임을 추격에서 선도로, 실행에서 개념설계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진국과 선진국을 가르는 경계가 너무나도 뚜렷하기 때문이다. 2025년은 한국의 산업과 사회가 예상치 못했던 당혹스러운 정치적 불확실성을 털어내고, 중장기적인 대전환의 큰 발걸음을 내딛는 한 해가 되기를 정말 간절히 소망한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