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경 대기자 |
스무 살 무렵 새벽에 영장도 없이 들이닥친 수사관들에게 끌려갔다. 고문하기 전 눈을 가리고 등 뒤로 수갑을 채우면서 “민주주의? 그런 건 어디에도 없어”라고 속삭였다.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고, 위반하면 영장 없이 체포·구금해 처단한다는 12·3 비상계엄 포고령이 발동되던 순간 46년 전 긴급조치 9호의 악몽이 떠올랐다.
계엄과 탄핵의 와중에 일본 대기업의 최고경영진이 한국을 찾았다. 사전에 제주도로 정해졌던 회의 장소를 인천공항 부근으로 바꿔달라고 했다. 여차하면 바로 떠나겠다는 것이다. 필자는 불안해 하는 그분들에게 “한국민주주의의 회복력을 믿어 달라”고 했지만 “내란 중인 남미, 아프리카 나라 취급을 받는구나”라는 생각에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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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슴 주제에 황제로 착각해 내란
권한대행 계엄 전후 전모 밝히고
몸 던져 막지 못한 자들 사죄해야
분권·협치 7공화국…시대의 명령
윤석열 대통령은 참수(斬首)부대까지 동원한 내란의 수괴다. 민생과 안보를 지옥문 앞에 내팽겨치고도 죄책감이 없다. 야당에 대한 “경고성 계엄”이라고 했다. ‘대통령 측’ 변호사는 “체포의 체 자도 꺼낸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수방사령관에게 “총을 쏴서라도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국회의원들을 끌어내라”고 지시한 사실이 드러났다. 발포 명령은 전두환도 끝까지 부인한 중범죄다. 국회의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된 뒤에도 “내가 2번, 3번 계엄령 선포하면 되는 거니까 계속 진행해”라고 했다.
계엄 해제를 발표하는데 왜 3시간 반이 걸렸는지 이제야 알게 됐다. 검찰은 대통령이 국회를 무력화시킨 뒤 별도의 입법기구를 창설하려 한 의도까지 확인했다고 했다. 전 정보사령관의 수첩에 적혀 있던 ‘북방한계선(NLL)에서 북 공격 유도’는 또 무엇인가. 경고성 계엄은 거짓말이다.
대통령은 통치의 자격도, 능력도 잃었다. 여권 인사들도 그냥 하야하는 게 맞다고 한다. 대통령은 “법적·정치적 문제를 회피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소환장 수령을 거부하면서 수사에 불응하고 있다. 헌재에서 계엄의 정당성을 주장해 살아 돌아오겠다는 태세다. 세계가 이 나라를 어떻게 볼 것인가.
윤석열 내란에 대한 국민의힘의 입장은 무엇인가. 대다수 의원은 국회 계엄해제요구안 의결에 불참했다. 탄핵소추안은 일부 의원이 찬성했지만 당론은 반대였다. 국회 몫 헌법재판관 3인을 대통령 권한대행이 임명하는 것도 반대하고 있다. 대법원도, 헌재도 임명에 문제가 없다고 밝혔지만 귀를 닫고 있다. 이대로 가면 헌재는 6인 체제로 굴러가다 내년 4월 18일이 되면 두 사람이 퇴임해 4인 체제가 된다. 아예 탄핵 심리가 불가능해진다. 국민의힘은 탄핵 지연전술로 윤 대통령의 복귀를 돕겠다는 건가. 보수의 핵심 가치인 헌정 질서와 안보를 누더기로 만든 대통령과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것인가. 분명한 입장을 밝히고 국민 앞에 사과해야 한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이 재판관을 임명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줘야 한다. 최 권한대행은 계엄 전후 대통령과 국무위원 주변에서 벌어진 모든 일을 조사해 한 점 의혹 없이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몸을 던져 막지 못했던 비겁함에 대해 정부 책임자로서 눈물로 사과해야 한다.
야당도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특별검사 임명을 야당이 주도하도록 한 내란 특검법, 김건희 특검법은 위헌 소지가 있다. 여당과 타협하고 중립적 인물로 양보해야 한다. 한덕수 전 대통령 권한대행은 유능했고, 동맹국 미국과 세계를 안심시킬 수 있는 최적의 인물이었다. 그를 성급하게 탄핵한 것은 수권정당답지 못했다.
공산국가 폴란드 출신인 석학 아담 쉐보르스키 뉴욕대 정치학과 명예교수는 1780년대 이후 전 세계 국가의 정치권력이 민주주의 선거에 의해 570번, 쿠데타로 인해 607번 교체됐다고 했다. 민주주의 체제의 존속 기간은 대개 20년 안팎이고, 50년을 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했다. “흔치 않고 취약한 시스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는 1987년 민주화 이후 37년간 유지됐지만 최근 20년 동안 대통령 탄핵소추만 세 번을 겪었다. 분명 흔들리고 있지만 비관할 일은 아니다.
머슴이 스스로를 황제로 착각하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개인의 성정과 일탈도 문제지만 시대착오적 폭동을 가능하게 한 제왕적 대통령제를 수술해야 한다. 협치하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도록 권한을 확실하게 분산해야 한다. 아예 호칭을 ‘큰머슴’으로 하는 건 어떤가. 로마인들은 우쭐한 개선장군에게 노예를 시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라고 속삭였다. 대통령에게 탄핵을 기억하게 할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쉐보르스키는 저서 『민주주의와 시장』에서 “나의 초원은 푸르리라고 생각했던 것만큼 푸르지 않았다”고 했다. 민주주의의 도래는 반복적으로, 불가피하게 실망을 경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인류 최고의 정치 제도다. 분권과 협치로 다원사회의 주역인 시민이 주인이 되도록 해야 한다. 개헌을 통한 7공화국 개막이 시대의 명령인 이유다.
이하경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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