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
“초고령사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025년 새해 인사는 이렇게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지난 연말 한국의 65세 이상 인구는 20%를 넘어 초고령사회로서의 첫해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 아찔한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두려움을 유난히 심하게 느껴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내리막 포비아’라고 이름 붙이자. 한 사회나 혹은 한 세대가 내리막 포비아를 겪을 수도 있다. 초고령화와 탈산업화는 내리막을 부추기는 가장 큰 요인들이다.
나날이 뛰는 집값에 내 집 마련은 언감생심이고 잡히지 않는 불안감에 우울증을 앓는 청년들도 급증했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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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은 초고령 사회 시작되는 해
MZ 세대는 내리막 앞 공포 호소
극도의 자기보호와 서열화 집착
이를 치료할 기성세대는 방관만
내리막 포비아를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 사람들은 앞으로 그곳에서 삶의 대부분을 살아가야 할 젊은 세대일 수밖에 없다. 기성세대가 소위 MZ세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기 시작한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다. 신기하다는 듯이 얘기하지만 사실은 부정적인 경우가 많다. MZ세대는 개인주의적이고, 원하는 소비에 과감히 지갑을 열고, 공정성에 민감하고, 이직 가능성에 열려있다는 것이 대표적으로 기성세대가 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상이다. 숨겨져 있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솔직히 드러내서 다시 말하면 MZ세대는 이기적이고, 돈 아까운 줄 모르며, 별걸 다 트집 잡고, 직장에서 키워주면 도망간다는 인식이다. 그러면 그들은 왜 기성세대와 다를까. 한국인의 유전자가 어느 날 갑자기 변했을 리 만무한데 ‘요즘 애들’은 왜 그럴까.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게 만드는 기술변동의 문제만도 아니다. 똑같은 기술 환경에 노출된 다른 나라 젊은 세대와도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20대 제자들과 어렵사리 마음을 열고 대화할 기회를 만들었다. 본인들의 생각과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그들이 공통으로 꺼낸 단어는 ‘공포’였다. 단군 이래 최고 선진국이 된 오늘의 한국에서 공포라니.
내가 태어나던 해에 우리나라 1인당 GDP는 100달러 남짓했다. 2024년에는 일본을 추월해서 4만 달러 정도이다. 명목 GDP로 단순비교하면 우리 세대는 살면서 400배의 경제성장을 경험한 것이다. 1970년대 한국의 국가적 목표는 ‘수출 100억 불(弗), 국민소득 1000 불’이었다. 지금의 기성세대는 국민소득 100달러에서 태어나 1000 달러에도 살아봤고 1만 달러에도 살아보면서 4만 달러까지 50년 넘게 오르막에서만 살았다. 조금 과장하면 지금의 젊은 세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하루도 에어컨 없는 방에서 자본 적이 없는 이들이다. 그런데 이제 처음으로 한국은 내리막길로 접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붕괴될 결심. 일러스트=김지윤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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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업 강국 한국은 탈산업사회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지 못하고 있고, 초고령사회 한국은 부양할 사람에 비해 부양받을 사람이 너무 빨리 너무 많아지고 있다. 여론조사에서 자녀 세대가 부모 세대보다 더 못 살게 될 것이라는 응답이 처음으로 과반을 차지한다. 이제 내리막 사회에서 살아야 하는 젊은이들은 공포를 느낀다. 에어컨 없는 여름밤이 어떨지 짐작도 안 된다. 아찔한 내리막 포비아다. 한국은 높이 올라왔기 때문에 내리막의 공포도 더 크다. 오르막에서만 살아본 기성세대는 그들의 공포를 이해하지 못한다.
내리막에 대비한 극도의 자기 보호가 그들 행동의 많은 부분을 설명한다. 요즘 학생들은 대학 서열화에 훨씬 더 민감하다. 대학의 순위를 매기고, 학과의 순위를 매기고, 수시인지 정시인지 입학전형의 순위를 매겨서 낮은 대학 낮은 학과 낮은 전형을 무시한다. 젊은이들끼리 모이는 게시판에는 본인의 외모, 가족 배경, 출신 학교, 직장, 연봉 같은 것들을 나열하고 이 정도면 상위 몇 퍼센트냐고 묻는 글들이 넘쳐난다. 강박적이다. 기성세대는 대학 서열화 하지 말자고 수십 년 외쳐왔는데 젊은 세대는 자발적으로 아주 철저하게 스스로를 서열화한다. 참담한 비유지만, 침몰하는 배 안에서 에어포켓에 고개를 내밀려면 위에서부터 몇 번째에 속해야 하는지 절박하게 묻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과잠(학과 점퍼)’ 열풍은 그렇게 확인한 자기 생존 가능성의 과시이다. 의대 증원 사태에 의대생들이 그렇게까지 분노한 배경에는 이러한 서열화도 하나의 축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불합리한 정책을 밀어붙였지만, 불합리한 정책의 피해는 다른 대학 다른 학과도 종종 당하는 일이다. 치열하게 공부해서 에어포켓의 꼭대기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을 감히 건드렸다는 분노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싶어하는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의 내리막 포비아를 적극적으로 치료하려고 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사실 내 자식도 그렇게 키웠다는 공범 의식도 숨어있다. 그러나 젊은이들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과 아무도 어른 노릇을 하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내리막을 평지로 만들 리더십을 만들어내거나 내리막을 두려움 없이 헤쳐나갈 정신의 힘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초고령사회 첫해를 맞은 한국의 과제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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