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1.02 (목)

[삶의 향기] 정지의 힘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중앙일보

김미옥 작가·문예평론가


매년 연말이면 잠시 멈춰 서서 내가 무엇을 했는지 한해를 정리한다.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다사다난한 해였다. 숨 가쁘게 달렸고 좋은 일과 우울한 일도 있었다. 학교와 도서관, 서점 등 나를 부르는 곳은 전국을 가리지 않고 독서 강연을 다녔고 책도 몇 권 냈다. 내가 다녀간 후 변화가 생겼다는 말을 들으면 보람을 느낀다. 가장 기뻤던 일은 내가 갔던 지방 도시에 48개의 독서동아리가 결성된 것이었다. 나를 만나고 책을 읽게 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책을 읽은 사람은 읽기 전의 자신과 달라진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언제부턴가 내 강의에 참석하는 이들의 연령층도 다양해졌다. 3대가 손을 잡고 함께 오는 경우도 있다. 지방 강연을 마치고 밤새도록 운전하며 돌아와도 피곤하지 않았다.



‘인권’ 기원은 18세기 대중소설

책 읽기 전과 나는 다른 사람

공감 능력 키워 세상 바꿀 것

12월 3일 나는 운전 중에 계엄 담화문을 들었다. 1980년대의 트라우마가 상처로 남은 내게 한밤중의 포고령은 공포심을 불렀다. 언론과 출판 통제, 집회 금지, 선동, 처단 등의 단어는 길가에 차를 세우게 했다. 몇 시간 만에 계엄은 해제되었지만, 그 밤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중앙일보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지난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탄핵 문구가 적힌 응원봉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연일 모이는 여의도의 시위 군중은 공통의 기억을 가진 기성세대보다 젊은 층들이 많았다. 군부독재 시대를 경험하지 않았던 20, 30대의 젊은 세대였다. 혹자는 80년대의 엄혹한 군부독재를 겪어보지도 않은 젊은 세대들의 시위 모습이 잔칫집에 놀러 온 것 같다고 질타한다. 내가 본 현장은 마치 세대가 통합된 것 같았다. 기성세대들은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불렀고 젊은 층들은 어른들이 젊은 날 불렀던 민중가요 ‘광야에서’를 불렀다.

생존이 불안한 각자도생의 시대에 다른 세대가 어울려 질서와 화합을 이루는 모습은 진풍경이었다. 나는 독서가 젊은 세대들의 역사의식을 축적했다고 생각한다. 한강의 작품은 노벨상 수상 발표 닷새 만에 100만 부를 돌파했고 12월 현재 200만 부를 넘었다고 한다. 국가 폭력을 다룬 작가의 『소년이 온다』나 『작별하지 않는다』는 지금도 서점 베스트 셀러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그 이전에도 많은 작가가 ‘기억 전달자’로서 꾸준히 작품을 세상에 내어놓았다. 세대를 초월한다는 말은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안고 가는 것이다. 축적의 힘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린 헌트는 인권이 18세기에 ‘발명’되었다고 했다. 그는 『인권의 발명』에서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의 기원은 대중소설이라고 했다.

혁명 전 영국과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세 권의 소설을 들었는데 새뮤얼 리처드슨의 『파멜라』와 『클러리사 할로』, 장 자크 루소의 『신엘로이즈』였다.

소설이 유행하던 시기는 주인과 하인, 남자와 여자, 귀족과 평민 등 약자가 강자에게 굴종하는 불평등한 관계가 당연시되던 시대였다. 서간체의 감성 소설이 대중에게 끼친 영향은 상당했다. 작품 속 등장인물에 감정이입이 되면서 자신과 동일시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약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민하며 평소 자연스럽게 생각했던 가치관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소설은 대중들에게 균형감각과 공감 능력을 향상하는 교육의 장이었다.

인간이 가진 가장 큰 비극은 배타성이고, 유대감은 누군가에게 또 다른 ‘폭력’일 것이다. 힘없고 가난한 사회적 약자의 경우 더욱 그렇다. ‘만인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진다’는 인권의 기본 원칙을 만들어 낸 건 공감 능력이었다.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는 인권 의식은 그렇게 태동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문학이 인간의 권리를 ‘발명’하고 사회를 변혁시켰다는 역사학자의 말에 일부 동조한다. 계급과 인종, 성별을 초월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배양한 것은 ‘독서’였다.

역사는 진보와 퇴보를 거듭하며 다시 돌고 돌기도 한다. 그러나 때로 전체가 나서서 퇴보를 막아야 하는 순간도 있다. 나는 독서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중앙일보

정지의 힘. 일러스트=김지윤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 내년 계획을 세우고 있다. 보다 많이 읽고 쓸 것이다. 책이 있는 곳에서 사람들과 함께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책을 읽는 정지의 순간을 상상한다. 숨소리마저 낮게 들리는 시간, 도약은 그렇게 온다. 올해의 마지막 밤 백무산의 시 ‘정지의 힘’을 소리 내 읽으며 한 해를 마무리한다.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달리는 이유를 안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김미옥 작가·문예평론가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