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홍윤표 선임기자] 눈이 부시다. 『근대서지』를 펼쳐 드는 순간, 별천지가 열린다. 그야말로 서지의 바다에 흠뻑 빠져들게 만드는 마력을 지닌 반년간(半年刊) 잡지가 바로 『근대서지』다.
2010년 3월에 첫 호를 펴낸 이래 15년 동안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서지(학)의 세계’를 실증적으로 그려냈던 『근대서지』 가 마침내 통권 30호(2024년 하반기호)를 발간했다.
근대서지학회 주관, 근대서지연구소가 발행해온 『근대서지』(발행인 겸 편집인 오영식, 민속원 제작) 30호의 표지는 채만식의 소설집 『탁류(濁流)』로 장식했다.
오영식 근대서지학회 회장은 『탁류』를 표지로 내세운 경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대담잔인(大膽殘忍)하게 묘사한 인간탁류(人間濁流)와 세태의 나상(裸像)을 엿볼 수 있는 (『박문(博)』 13호, 1939.12) 『탁류』는 일제강점기 발행본을 만나기가 매우 어려운 책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인연일까. 지난달(11월) 국립한국문학관이 청와대 춘추관에서 개최한 ‘한국문학의 동맥(動脈)’이란 전시에 『탁류』 초판(1939)이 선을 보였고, 같은 달 하순 인사동 경매에는 『탁류』 재판(1941)이 모습을 드러냈다.(…) 필자는 10여 년 전 정현웅의 장정(裝幀)을 갈무리하면서 『탁류』의 이미지를 구하는 데에 애를 먹어 이 책이 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근대 문학사나 소설사에서 이 책의 초판 발행 일자를 밝힌 것을 보지 못했다. (……) 필자가 정현웅 장정 자료집 『틀을 돌파하는 미술』에 소개한 『탁류』의 이미지는 앞표지 좌측 상단에 ‘재판금지(再版禁止)’란 기록과 함께 ‘1941년 5월 27일 자’의(총독부) 도장이 찍혀 있다. 『탁류』는 1939년 12월 15일에 초판이 발행되었으며, 1941년 5월 30일 재판 발행되었는데 물론 앞의 ‘재판금지’가 단순한 ‘재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발행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일제강점기에 추가 발행이 확인되지 않은’ 『탁류』의 표지 그림은 월북 화가인 정현웅이 그린 것이다. 월북 소설가 김남천(南天)은 『탁류』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신문에 났던 것을 다시 고쳐 쓰고, 그러노라고 여간 정성을 쓰지 않았다. 책도 당당 7백여 페이지로 장정은 정현웅 씨 것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리만큼 잘 되었다.”(『濁流』의 魅, 『조선일보』,1940.1.15.)
그만큼 소중하고 귀한 책, 『탁류』의 이미지를 기념비적인 『근대서지』 30호의 표지로 삼은 ‘깊은 뜻’을 오영식 근대서지학회장의 이 글로 충분히 살펴볼 수 있겠다.
예나 마찬가지로 다양, 다채롭게 꾸며놓은 『근대서지』 30호에는 특히 원로 언론학자인 정진석(85)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의 ‘평생 모아온 책들을 품 안에서 떠나보낸 가슴 아린 사연'을 실은 글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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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들과의 기막힌 이별…책을 쓰고 만들며 보낸 일생, 사라진 언론 사료들’이라는 제목으로 써 내려간 정진석 교수의 글은 평생 언론인, 언론학자로 살아온 노교수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담담하게 돌아본 회고록이자 한 책(언론 관계) 수집가의 사무친 ‘책 이별기’이기도 하다.
정진석 교수는 “나는 평생을 책과 함께 살아온 사람이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 논문과 책을 집필하는 과정은 책과 자료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이 좋아서 모았고, 많은 책을 만들었다. 저서가 30여 권에 공저와 편저도 적지 않다. 수십 권이 넘는 신문과 잡지 영인본을 편찬했다.”면서 “우리 최초의 신문인 『한성주보』에서 서재필 선생의 『독립신문』, 배재학당 학생들이 만든 『협셩회회보』, 『매일신문』, 『대한매일신보』의 국한문판과 한글판, 해방 후에 발행된 4대 신문(경향, 동아, 서울, 조선, 1945~1953) 지면(해방공간 17책, 전쟁기 간행12책)까지 내 손으로 영인했다. 내 글이 실린 잡지와 논문집도 많다.”고 설명했다.
그랬던 그 책과 자료들을 노교수는 ‘어쩔 수 없이’ 떠나보냈다.
“내 일생의 동반자이자 분신이기도 했던 책과 자료가 일시에 내 품에서 사라졌다. 좋은 장소를 찾아 고이 보내지도 못했다. 내게는 한 권 한 권이 소중한 책들이었다. 하지만 고서점의 손에 넘어가는 순간 두 가지 기준으로 생존과 폐기의 기로에 놓인다. 찾는 사람이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라는.”
책 수집가라면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길의 운명과도 같은, 노 교수의 회한과 한탄은 길게 이어진다.
“(책은) 상품 가치 있는 물건이냐, 쓰레기 파지 신세가 될 것인가로 운명이 정해진다. 하지만 이 세상 떠날 시간이 다가오는 나 같은 사람이 마냥 껴안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럴 능력도 없다. 모든 인연에는 만남과 이별이 있기 마련이다. 나를 낳고 길러준 부모님, 형제, 친구, 연인, 소중한 인연도 언젠가는 이별의 쓰라림과 마주한다. 하지만 학문의 동반자, 내 인생 고비마다 사연이 담겨 있는 책을 떠나보내는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프고 허전하다. 책을 사랑했던 연구자 입장에서 책과의 이별은 어린아이가 어미를 잃은 심정에 견줄 수 있지 않을까.”
“이제 다시는 우리 사회 어느 곳에서도 내가 수십 년에 걸쳐 모았던 언론 관련 책들을 함께 볼 장소는 없다. 책은 영원히 사라졌다. 사회와 언론학계에 죄스럽고 안타깝다. 가슴이 아프다”는 노 교수의 술회는 ‘책의 운명과 유전(流轉)’, 그리고 책의 세상과 그와 연관된 세태를 가늠해보고 되새겨볼 수 있는 계기로 만든다.
『근대서지』 30호는 출판과 문학, 예술 분야의 여러 자료를 연구자들의 다각도의 시각으로 편찬해놓았다. 그 가운데 시집 『진달래꽃』 연구에 일가견이 있는 엄동섭 창현고 교장의 ‘『진달래꽃』 초간본 이본의 인쇄 방법 추정에 대한 반론’이나 한상언 영화연구소 소장의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두 권의 『천자문』’같은 글이 자못 흥미롭다.
조선전기 명필로 이름난 한석봉(韓石峯)의 『천자문』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다수의 필사본을 포함하여 목판본, 활자본 등 다양한 판본의 책 가운데 한상언 소장은 그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일제강점기에 나온 두 권의 『천자문』을 중심으로 구입 과정과 더불어 그에 얽혀 있는 얘기를 재미나게 풀어주었다. 바로 대조적인 인물인 만해 한용운과 을사오적 이완용의 『천자문』이 그것이다.
이번 『근대서지』 30호에는 근대서지에 관심 있는 애호가, 동호인, 연구자라면 반드시 눈여겨봐야 할 자료가 잔뜩 실려 있다.
오영식 회장이 심혈을 기울여 연재해온 “해방기 잡지 목차 정리 ⑧-‘치읓’ - ‘히읗’으로 시작하는 잡지들”이 이번 호로 장저의 마무리를 지었다. 아울러 지난 29호부터 시작한 ‘문학서적을 중심으로 살펴본 근대문헌의 가치-②소설책’도 흥미로운 연재물이다.
오 회장은 “‘수집가와 연구자의 가교(架橋)’를 내세우며 학회를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료의 확보가 능사(能事)는 아니었다.(……) 여전히 ‘세상은 넓고 자료는 많다.’ 『근대서지』에는 책 관련 정보와 많은 글이 실리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권말 영인(影印)이라 생각한다. 출판사들이 사업 채산상 영인본을 쉽사리 내지 못하는 현실에서 잊혀가는 자료 하나라도 원본 형태를 확인할 수 있도록 영인하는 일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근대서지』 발간의 의미를 되짚었다.
사진 제공=근대서지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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