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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3 (금)

[필동정담] 을사년, 평행이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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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중에 '을씨년스럽다'란 단어가 있다. 날씨나 분위기가 몹시 스산하고 쓸쓸하다는 뜻으로, 그 어원은 '을사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1905년 11월 17일 강제 을사늑약 체결로 일본에 외교권을 박탈당하면서 온 나라는 치욕스러움과 침통함에 휩싸였다. 그 후 끄물끄물하고 어수선한 날이 오면 마치 을사년 같다고 해 '을사년스럽다'는 표현을 쓰게 됐고, 이 말이 '을씨년스럽다'로 변형됐다고 한다. 1908년 출간된 이해조의 신소설 '빈상설'에 '을사년시럽다'란 단어가 등장한다.

을사년에는 또 다른 흉흉하고 비통한 일도 있었다. 1545년 을사사화. 조선 명종 즉위년에 인종의 외척인 윤임(대윤)과 명종의 외척인 윤원형(소윤)이 세력 싸움을 벌인 끝에 소윤이 승리하면서 대윤이 모조리 숙청된 사건이다. 피바람이 휘몰아치며 선비 수백 명이 비명횡사했다.

이렇듯 을사년에 대한 기억은 좋지 않다. 다시 밝은 새해도 을사년이다. 정치적 격변기였던 그때처럼 시국이 위태롭다 보니 '역사의 평행이론' 운운하며 불길한 전망을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국가 흐름이 비슷하게 흘러갈 것이라는 불온한 예측들이다. 지금 누란의 위기에 놓인 국가 상황을 보면 이런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에 무안 항공기 사고까지 이렇게 전대미문의 국가적 우환이 겹치기도 쉽지 않다. 국격이 속절없이 추락하고, 경제도 불확실성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경제 선진국 한국이 어쩌다 세계의 조롱거리가 됐냐"는 절망과 탄식이, "국운이 기울고 있다"는 비관도 나온다.

국민이 허탈함과 열패감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과거에 얽매여 국운 타령하며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올해를 '을사년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그 굴레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삼아볼 만하다. 위기 때마다 우리 국민은 강한 응집력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비록 120년 전 을사년은 치욕스러웠지만, 푸른 뱀의 해인 2025년은 달라질 수 있다. 을씨년스럽지 않은, 밝고 희망적인 해로 만드는 것은 우리 의지에 달렸다.

[심윤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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