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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5 (일)

고통을 관음하고 전시하는 행위…일부 언론만의 문제인가[이진송의 아니 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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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10·29 …제주항공 여객기…사회적 참사에 대한 ‘애도’의 정치적 가능성

경향신문

영화 <당신의 사월> 스틸컷. 시네마 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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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를 훼손하려는 시도는 집요…‘분리’ ‘타자화’를 통해 익명화
또는 고통에 지나치게 파고들어 디지털 세계 속에 콘텐츠로 소비
당사자와 비당사자의 경계를 허물고 ‘함께하는 것’이 진정한 애도

지난달 29일, 제주항공 7C2216편 여객기 참사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큰 고통 속에 있을 유가족에게 깊은 애도를 표한다. 이런 문장은 어떻게 써도 어색하다. 선명한 고통에 닿을 수 없는 형식적인 표현처럼 느껴진다. 동시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담함과 안타까움을 어떻게든 담아내는 그릇이기에, 쩔쩔매며 ‘애도’라는 단어에 기댄다. 애도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죽음을 슬퍼함’이다. 당사자가 아니라면 사건은 ‘남의 일’이다.

그러나 반복되는 한국 현대사와 참사에서 경험하였듯 누군가의 죽음은 ‘남의 것’이 아니다. 직접적인 연결 고리가 없더라도. 공동체에 속한 누군가의 죽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의, 무수히 연루되며 관계하는 존재에게 큰 사건이다. 잇따르는 참사와 증오 범죄는 시민들의 의식 깊은 곳에 ‘우연히 살아남았다’라는 감각을 새겼다. 애도는 확장하는 감각이다. 상실을 경험하고, 그 상실을 둘러싼 세계를 직면하게 하며, 비좁은 ‘나’의 경계를 넘어 타인과 연결한다. 애도는 정치적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래서 애도를 훼손하려는 시도는 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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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너와 나> 속 한 장면. 필름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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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분리와 타자화다. 참사와 고통을 특별하고 비일상적인 사건으로 규정하고, 피해자나 생존자를 익명화한다. 국가가 나서서 국가 애도기간을 선포해버리며 애도의 주체와 방식을 박탈한 10·29 참사에서 위패나 영정이 없었던 합동분향소가 대표적이다. 이름과 얼굴이 없는 숫자로만 존재할 때 개인의 고유함이나 서사는 사라지고 공동체의 기억과 상호작용할 수 없다. 또 다른 고립의 전략은 원인을 개인에게 돌리는 것이다. 왜 비행기가 아닌 배를 타서, 서양 문화에 심취해서 노느라고, (비행기를 탔더니) 왜 저가 항공을 타서 등등, 특정 조건을 강조하며 피해자를 비난한다. 그렇게 조건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비당사자들을 사건 및 유가족과 떨어뜨린다. 참사와 일상, 참사의 당사자와 외부인을 구별하고 ‘불편한 사건’으로부터 지켜야 할 ‘안온한 일상’을 설정하면 이제 고통은 ‘평화를 깨뜨리는 가해자’로 둔갑한다. 세월호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이 ‘지겹다’라는 감정적 공격처럼 자신의 생활을 지키려는 평범한 욕구가 타인의 슬픔을 탄압하는 폭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Zone of Interest)>는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의 영화로, 제목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인근 지역인 일명 ‘관심 구역’을 의미한다. 실제로 아우슈비츠 담장과 마주하고 살았던 나치 사령관 루돌프 회스라는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다. 국내에는 2024년 여름 개봉했다. 이 영화의 중심 이미지는 아름답고 잘 정돈된 중산층 가정의 일상이다. 정원에는 꽃이 흐드러졌고 아이들은 웃고 떠들며, 가족 구성원의 생일 파티가 벌어진다. 담장 너머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집단 학살과 시체 소각이 바로 옆에서 벌어지지만, 이들은 소음과 연기에 불편해하면서도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곳은 영화 포스터의 홍보 카피이자, 회스의 아내가 확신에 차 외치듯 “이토록 완벽한 집”이다.

회스가 아우슈비츠 관리인으로서 ‘효율적인 소각 시스템’을 고민하거나, 군인들이 가족들에게 선물하려고 아우슈비츠 희생자들의 옷을 나눠 가지는 장면, 아이들과 남편을 사랑하는 회스의 아내가 폴란드인 가정부에게 “남편에게 말하면 너 따위는 재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고 소리 지르는 장면은 널리 알려진 해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게 한다.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한 아렌트는 나치의 대학살을 주도했던 아이히만이 아주 평범하고 친절한 사람이었으며 그가 단지 지시 사항을 성실히 이행했다고 주장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특별히 사악하거나 악의를 품지 않은 사람이라도 ‘스스로’ ‘비판적으로’ 사유하지 않은 채 ‘주어진 것을 당연하게’ 이행할 때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악의 평범성은 개인이 구조적 폭력에 동조하거나 이를 방관할 때 자주 쓰이며, 비상계엄 선포 당시 군인들의 상반되는 명령 수행 여부에서도 언급되었다. 참사를 마주하는 태도에도 적용 가능하다. 어째서 사회가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고립시키는지는 의심하지 않은 채 유가족의 ‘불순한 의도’를 의심할 때, 죽음이라는 거대한 상실보다 ‘나’의 기분에 나는 조그만 흠집 하나가 중요할 때, 그리하여 사유와 직면을 포기하고 외면할 때, 그런 자신이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합리화하고자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잘못을 돌릴 때 딛고 선 곳이 바로 ‘존 오브 인터레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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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중. 찬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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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타자화의 또 다른 방식은 분리와 반대로, 고통에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정확히는 고통을 관음하고, 전시하고, 무분별하게 배포하는 행위이다. 수전 손태그는 잔혹한 참상을 담은 사진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쏟아지는 이미지에 무감각해져 결국 이미지에 담긴 고통 자체를 외면한다면 결국 타인의 고통을 착취할 뿐이라며 사물을 대상화하는 이미지 소비를 비판했다. 관심 경제와 디지털 시대인 2024년, 한국에서는 기자로 활동하는 김인정 작가가 쓴 <고통 구경하는 사회>(웨일북스, 2023)가 맞춤한 근거를 제공한다. “고통을 판다. 고통을 본다. 고통은 눈길을 끌고… 때로는 돈이 된다. 고통이 자주 구경거리가 됐다는 건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이제 고통은 콘텐츠가 됐다. 콘텐츠가 된 고통은 디지털 세계 속에서 클릭을 갈망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 산업의 틈바구니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버글대다 보면 나도 모르게 고통을 착취하거나 구경하고, 모른 척 지나친다.”(49쪽) 이번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에서도 MBC가 여객기가 폭발하는 장면을 그대로 내보내 비판을 받았다. 작가는 10·29 참사 당시 빠르게 온라인에서 확산했던 동영상과, 구호를 할 수 있는 거리에 있음에도 촬영만 하는 카메라의 각도, 이를 소비하고 유포하는 대중을 보며 구경꾼의 존재를 인식한다. 또한 한국기자협회의 재난 보도준칙 등을 검토하며 구경꾼과 특종을 노리는 기자들은 무엇이 다른지 고찰하며 고통을 중개하는 일의 윤리적 딜레마를 고민한다. 모두가 카메라를 지닌 지금, 이는 소수의 언론인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서울시교육청이 전국미디어리터러시교사협회와 배포한 ‘재난 상황에서 디지털 시민을 위한 올바른 미디어 이용 가이드’에는 “비극적인 장면을 함부로 촬영하거나 공유하지 않습니다”라는 항목이 있다. 찍는 자가 고통을 기록한다는 명목으로 고통의 당사자에게 또 다른 고통을 주지 않으면서 ‘함께’하기. 보는 자가 ‘구경’하고 스펙터클(볼거리)로 소비하지 않으면서 ‘함께’ 있기. 기억과 애도는 어떻게 가능할까? 이 질문을 예술로 치환하면 다음과 같다. “참사와 비극을 어떻게 재현할 수 있을까?” 세월호 참사를 다룬 작품을 예로 들자면, 진실 규명이나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둘러싼 유가족의 고군분투부터 민간 잠수사의 경험, 유가족의 일상, 당사자와 비당사자의 연대 등 서로 다른 지점에 포커스를 맞춘다. 배우 조현철의 장편영화 감독 데뷔작인 <너와 나>(2023)는 제주도 수학여행을 앞둔 두 여고생의 하루를 그렸다. 세미(박혜수)와 하은(김시은)의 평범한 일상은 언뜻 몽글몽글한 청춘 영화로, 퀴어를 특별하지 않게 연출하는 퀴어 영화로 보인다. 영화는 곳곳에 세월호 참사를 암시하는 단서들을 배치했다. “사회적 재난을 스펙터클로 소비하지 않겠다”는 감독의 의도이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동안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조합하여 이를 추론한다. 영화는 참사를 처참하게 묘사하지 않으면서도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것이 이름과 역사와 취향과 감정을 가진 이를 어떻게 집어삼켰는지 느끼게 한다. 관객이 참사를 자신의 기억 속에서 재구성하는 경험을 통해.

<당신의 사월>(2019)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주현숙 감독은 “자기 일도 아닌데 왜 사람들이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닐까?”라는 궁금증에서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래서 <당신의 사월>에서는 피해자나 유가족이 아니라, 세월호 참사를 곁에서 지켜본 비당사자·시민이 주인공이다. 이 사건을 목격한 시민, 교사, 우연히 행진하는 유가족을 만난 카페 주인, 사고 해역에서 시신을 수습했던 진도 어민 등이 등장하여 그날 이후의 삶을 이야기한다. 직접적인 당사자는 아니지만, 참사의 목격자이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비당사자의 삶 또한 변화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그 죽음이 없던 세계에 살았던 ‘나’는 죽는다. 슬픔을 나누고, 무언가를 상실한 세계가 이전 같지 않음을 받아들이고, 그리하여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살 수 없는 ‘나’가 된다. 그 용기가 당사자와 비당사자의 경계를 허문다는 것을 <당신의 사월>은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모든 애도의 말 뒤에는 ‘함께하겠다’는 말이 괄호 속에 있다. 함께한다. 그리고, 엄격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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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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