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69세가 된 김 모 씨(가명)는 아들, 딸 가족과 한 동네에 거주하면서 언제든 손주들을 만날 수 있는 현재의 생활이 만족스럽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있다.
아직은 혼자 생활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홀로 지내기가 점점 힘들어질 게 분명하고 일상을 위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가 됐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다.
김씨가 지금 집을 고쳐서 계속 사는 게 나을지 아니면 실버타운과 같은 시설에 들어가는 게 좋을지 고민하는 주기는 날이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
머릿속에서는 가족과 친구를 자주 마주하지 못하는 쓸쓸한 삶은 피하고 싶다는 바람과 자녀에게 돌봄 부담을 주기 싫다는 생각이 늘 부딪힌다.
#70대 이 모 씨(가명)는 최근 욕실 바닥을 미끄럼 방지 타일로 바꾸고 집안 벽 곳곳에 안전 손잡이를 설치했다. 거실을 포함한 집 전체 바닥에 매트 시공도 할 생각이다. 얼마 전 욕실에서 넘어져 병원에 누워 있는 친구 박 모 씨를 보고 겁이 났기 때문이다. 평소 이 씨는 수영과 탁구, 등산 등 여러 운동을 즐기며 또래보다 최소한 10년 이상 젊은 50대 같은 신체를 갖고 있다고 자부해왔고 박 씨는 늘 함께하면서 그에 못지않은 건강함을 보였던 사람이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씨는 “자녀들이 매트나 손잡이 얘기를 했을 때 늙인이 취급하는 것 같고 자존심도 상해서 거절했는데 항상 옆에 있던 팔팔한 친구가 다치는 걸 보니 생각이 확 바뀌었다”며 “안전하게 지내는 데 도움이 될 게 없는지 더 알아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격언이 된 한 광고의 카피다. 나이에 얽매여 선입견을 품거나 자신의 가능성을 제한하지 말자는 의미에서 상당히 뜻깊은 말이다. 초고령사회 진입했고 ‘나이 든 사람’이 늘어나는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우리에게 특히 그렇다.
실제로 강한 의지로 온 힘을 기울이면 이루지 못할 일은 거의 없다. 다만 신체의 변화는 예외다. 누구나 나이 듦에 따라 힘이 빠지고 민첩성이 떨어진다. 면역력이 약해지고 회복력도 더뎌지기 마련이다. 아울러 집에서 생활하는 방식과 생활 양식도 바뀐다.
우리 사회의 중심은 30~40대에서 50~60대, 그 이상으로 넘어가고 있다. 주거·생활 여건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집’이 성숙해져야 할 이유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삶의 틀을 크게 바꾸고 싶어하지 않고 살던 집에 계속 거주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2일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가 전국 20~79세 남녀 3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59.6%는 ‘노후에 내가 살던 곳에 계속 살고 싶다’고 밝혔다.
현재 거주지 평균 거주 기간은 9.1년이었는데 은퇴 후 가구가 13.1년으로 은퇴 전 가구 8.7년보다 길었다. 은퇴 후 가구가 해당 거주지에서 10년 이상 지낸 비중은 58.6%로 60%에 육박했다.
나이가 들수록 현재 살고 있는 곳에 친밀감과 안정감을 느끼고 계속 거주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연령대별 지속 거주 기간을 보면 이런 경향이 더 뚜렷하다. 20~44세는 평균 5.4년, 45~54세는 8.3년, 55~64세는 12.1년, 65~74세는 13.5년, 75~79세는 평균 16.1년이다. 40대 초중반까지는 5년 정도에 불과하지만 은퇴 전후인 60세 정도가 되면 10년가량, 65세 이상이 되면 15년은 이사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현재 거주지에서 얼마나 더 거주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에는 ‘노후까지 지속 거주’라고 응답한 비율이 25.9%로 가장 높았다. ‘가능하면 생을 마감할 때까지’란 응답도 10.8%를 차지했다. 노후가 시작된 은퇴 후 가구에서는 ‘노후 후반까지 계속 거주’와 ‘가능하면 생을 마감할 때까지’가 각각 48.8%, 17.6%로 나타났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는 “고령자가 살아온 지역사회에서 계속 거주하려는 ‘Aging In Place(AIP)’ 경향으로 해석할 수 있다”며 “AIP는 살던 곳에서 노년기를 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노인 복지 측면에서 지향점으로 제시돼 왔다”고 설명했다.
이런 경향은 65세 이상 노인만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보건복지부의 ‘2023년도 노인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건강을 유지하면서 현재 거주지에 계속 살기를 희망하는 노인은 87.2%다. 2020년 83.8%에서 더 늘어난 수치다. 건강이 악화해 독립적인 생활이 어려울 때도 현재 집에 계속 살기를 희망하는 비중도 48.9%로 절반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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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은 지금 사는 곳에서 지내고 싶은 욕구는 강하지만 주거 여건은 이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2023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전체 노인 중 9.4%는 주거 환경이 불편한 구조, 62.1%는 주거 환경이 불편하지 않으나 노인을 배려한 설비가 없는 곳에 거주하고 있다. 노인을 배려한 설비가 있는 주거지에 사는 노인은 28.5%다. 조사원들이 방문한 주택의 구조와 설비 등을 파악해 내놓은 결과다.
나이가 들어 자연스럽게 신체 활동력이 떨어진 노인들의 안전하고 편리한 생활을 위해서는 노인에게 맞게 집의 구조가 바뀌거나 안전 설비·용품이 설치될 필요가 있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문턱 등에 걸려 넘어져 뼈가 부러지거나 심한 경우 사망하는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소비자원의 ‘고령자 위해정보 동향 분석’ 자료를 보면 낙상사고는 고령자 안전사고 중 매년 60~70%가량을 차지한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소비자원에 접수된 낙상사고는 총 1만9377건으로 매년 4850건 가까이 발생했다.
낙상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한 장소는 ‘주택’이다. 주택에서 낙상사고가 발생한 비중은 72.5%(1만4041건)다. 4년간 낙상사고가 많았던 장소를 세부적으로 보면 화장실·욕실(4925건), 침실·방(4670건), 거실(3183건)이 1~3위를 차지한다. 안락함을 즐겨야 하는 공간이 노인들에게는 순식간에 부상, 심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협의 장소가 되는 셈이다.
실제로 노인들은 이런 위험을 인식하고 피하고자 안전설비·용품을 설치하고 있다. 노인실태조사에서 주택 화장실·욕실에 안전 손잡이나 바를 설치한 비율은 18.2%로 나타났다. 29.7%는 욕실 문손잡이를 더 쉽게 여닫을 수 있도록 바꿨고 단차를 없앤 가구는 22.6%, 낙상 방지를 위한 바닥재를 설치한 가구는 24.7%였다. 거주 주택 내 안전설비·용품 설치 또는 개조 필요성을 묻는 질문에는 항목별로 30~45%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앞서 살펴봤던 KB금융연구소 조사에서는 안전한 노후생활을 위대 주택 보수나 개조가 필요하다는 응답 비중이 71.3%였다.
남형권 주택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노인주택용 택지 공급, 노인 대상 아파트 특별공급 제도 도입, 노인주택으로 재건축·개조 시 인센티브 부여 등을 통해 노인주택 공급을 늘리는 한편 주거약자용 시설기준을 갖춘 노인주택 재고를 확대해야 한다”며 “노인인구 비중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중장기적으로는 일반주택도 설계와 자재 선택 등에서 노인의 활동력을 고려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투데이/전보규 기자 (jbk@e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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