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과신이 지나친 새해 다짐
목표 너무 높게 설정, 실패 반복
잘 보고 듣고 말하는 것 어려워
일상 속에 묵묵한 실천 나서야
새해 다짐과 관련해 내게 가장 큰 인상을 남긴 이는 가수이자 배우인 김창완이다. “새해에 특별한 기대를 걸지 않겠습니다. 새해를 마치 태양이 처음 뜨는 것처럼 맞지 않겠습니다. 새해에 갑자기 착한 사람이 되거나 깨달음을 얻는다는 망상도 접겠습니다. 돈을 많이 벌거나 성공한다는 꿈을 꾸지 않겠습니다. 다만, 새해에는 잘 보고 듣고 말하겠습니다.” 2014년 ‘SBS 연기대상’에서 특별연기상을 받으며 그가 한 말이다.
정시우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작가 |
나는 김창완의 인생관에 매료됐다. 늘 해왔던 대로, 그렇게! 거창한 의미 따위 부여하지 않고 새해를 맞이하겠다는 자세가 담백하고 멋지게 느껴져서 좋았다. 그런데, 그 후 10년. 지금은 정반대의 이유로 그의 말에 매혹을 느낀다. 2024년도에 처음 저 말을 접했다면, 나는 아마도, ‘야심’ 가득한 새해맞이 다짐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잘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게 돼서다. 우리 사회에서 점점 지워지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일까. ‘잘 보려는 사람’이 줄어들기 시작한 건. 그 자리를 대신 채우는 건 ‘보고 싶은 걸 보는 사람’들이다. 이는 소셜미디어라는 인터넷 인간 시장의 급성장과도 맞물린다. 이용자 성향에 맞춰 친구를 추천하고 편향된 정보를 띄워주니, 점점 더 그 세계 속에 갇히게 된다. 보기 싫은 사람은 손가락 클릭 하나로 차단하면 그만. 그렇게 같은 색깔의 옷을 입은 사람끼리 똘똘 뭉쳐, 다른 색깔은 무리에서 축출하거나 거짓이라고 몰아간다. ‘보고 싶은 것’이 진실이 돼 버린다. 동시에 어떤 어젠다를 선점해서 그것을 믿게 만드는 데 힘을 쏟는 사람들도 생겨난다. 이미 세상은, 편 가르기의 싸움터가 돼 버렸다.
두 번째, 경청. 경청이 사라진 자리에 어떤 파국이 일어날 수 있는가에 대해서라면, 2024년 ‘서울 계엄의 밤’을 겪은 이들로서는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뜬금없는 비상계엄령 선포로 자신을 정치적 위기에 몰아넣은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분석이 나오고 있지만, 공통으로 지적되는 건 ‘독단적 성향’이다. 실제로 독단적 성향으로 인한 소통 부족은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주원인으로 꼽혀왔다. (R&D 예산삭감에 항의하다가 사지가 들려 쫓겨난) 카이스트 학생 입틀막 사건, 대화 없이 밀어붙인 의대 정원 확대 강행 등이 그 연장선에 있다. 가까이에서 쓴소리를 한 이들을 윤 대통령이 불편해했다는 보도도 그가 얼마나 ‘선택적 경청’을 해 왔는가를 드러낸다. 불통의 정치로 인해 우리 지금 얼마나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있나.
잘 말하기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그 사례를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179명의 생명을 앗아간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를 두고 쏟아지는 말들이 그렇다. 사건 자체도 너무 안타깝고 비현실적이어서 어떤 단어를 골라야 할지 망설이게 되는데, 타인의 고통을 둘러싸고 나오는 어떤 말들은 너무 참담해서 무력감을 안긴다. 유족을 할퀴는 말들, 갈라치기를 조장하는 말들, 섣부른 말들, 타인의 아픔에 무감한 말들, 넘치는 많은 말, 말, 말들…. 말이 지닌 위력은 상당해서, 때로 칼보다 더 치명적으로 상대의 가슴을 찌른다. 내가 나에게 던지는 말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아마 안 될 거야” “나 따위가 어떻게…”. 혼잣말이든, 속삭임이든, 말에는 힘이 있어서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스스로가 초라해진다는 사실 역시 어렴풋이 깨닫는 나이가 됐다.
한 해의 끝과 새로운 해의 시작 앞에선 ‘잘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의 의미를 헤아려 본다. 그리고 그 무게를 잊지 않는 사람이 돼 보자는, 야심을 부려본다. 단, 작심삼일형 인간인 터라 조건은 하나 달았다. 삼일마다 다시 작심하기로.
정시우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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