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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5 (일)

[송민순의 한반도평화워치] ‘트럼프의 미국’에 주눅들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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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


영국의 진화 생물학자인 클린턴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옥스퍼드대 명예교수는 “한 집단에서 내부의 적을 제거하려는 유전자가 과도하게 발동하면 외부 위협에 대한 감각이 둔화하고, 결국 집단 자체가 소멸하게 된다”고 분석했다(『이기적 유전자』). 탄핵과 국제질서의 재편과정에서 불확실성이 커져 있는 한국이 2025년을 맞으며 새겨야 할 얘기다. 지난 70년 동안 한국의 안위와 번영의 울타리였던 국제질서가 붕괴하고 있고, 오는 20일 출범하는 ‘트럼프의 미국’은 경고음을 울린다. 이 와중에 안보와 경제의 대외의존도가 세계 최고수준인 한국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 등으로 국정이 파행 상태에 있다.



트럼프 ‘근육질 외교’ 시대 도래

트럼프 현상, 미국 힘 약해진 탓

‘초당 외교’로 돌파 기회 만들고

주고받기 동맹관계 발전시켜야

트럼프에 명분 주며 실리 추구하는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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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0일 제47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는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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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는 정부 출범도 전에 당장 2년 후 중간 선거에 내놓을 ‘조기 수확’ 품목을 노리는 눈치다. 트럼프는 외교에서 우크라이나와 중동 전쟁, 그리고 중국 견제에 주력하겠지만 동맹관계도 다시 설정하겠다고 한다. 한국과는 방위비, 북한 핵, 무역과 투자 등 세 분야에 집중할 것이다. 트럼프가 원하는 것은 동맹관계 자체를 바꾸기보다는 “전임자들이 못한 것들을 내가 해냈다”는 성적표다.

이런 안팎의 난관을 마주한 한국 정부의 대외정책은 옹색하다. 그러나 좀 과감한 자세로 ‘초당(超黨) 외교’를 구사하면 돌파의 기회를 만들 수 있다. 탄핵 정국이 어디로 가더라도 지속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판단되는 외교 방책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트럼프의 ‘근육질 외교’에 기죽지 않고 대처하도록 우리 정치권이 힘을 모아 줘야 한다. 초당성은 그 기초다. 이를 토대로 미국에 명분을 주면서 한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트럼프의 공세가 예상되는 방위비 분담을 보자. 1991년 한·미 방위비 분담협정(SMA)이 최초로 체결된 이래 일관해 온 원칙은 현지 발생 비용은 종국적으로 한국이 부담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거의 목표 수준에 도달하고 있다. 만약 트럼프가 기존의 분담 계획을 넘어 무리한 요구를 한다면 차제에 미군이 한국에서 원화로 구매하는 물자와 용역을 전부 현물로 직접 제공하겠다고 역제안을 할 수 있다. 트럼프로서는 “미군을 한국에 주둔시킴으로써 발생하는 비용은 100% 한국이 부담키로 했다”는 성적표를 제시할 수 있게 된다. 한국으로서도 군사동맹의 운용을 위해 제 몫을 다하고 있다는 명분을 세우게 된다. 한국의 추가 부담도 기존 증액 추세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는 한국 방어를 위한 미군 훈련비용 등 연간 수십억 달러를 더 내야 한다고 주장하곤 했다. 이는 미군을 용병으로 전락시키는 길이다. 트럼프도 미국의 자존심을 추락시킨다는 비판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래서 동맹에게 현금 대신 자체 국방예산의 증액을 요구한다. 증액 부분이 주로 무기구매에 사용되기 때문에 미국은 자체의 ‘군사비의 축소’와 ‘무기수출의 확대’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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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9년 6월 30일 주한미군 오산 공군기지를 찾았던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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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국은 이미 국내총생산의 2.5%를 군사비에 투입하고 있다. 동맹국 중 최고 수준이다. 트럼프 1기의 4년 동안만 해도 13조원어치의 미국산 무기를 구매했다. 한국은 미국 무기의 3대 수입국이다. 이런 모든 사정에도 불구하고 만약 ‘현금 인출기’를 거론하면서 돈을 요구한다면, 상호방위조약을 호혜적으로 운용할 미국 의지가 증발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북한 핵 문제도 그렇다. 미국에게 북한 문제는 우선순위가 높지는 않다. 하지만 트럼프는 집권 직후 북한의 장거리 핵 능력 억제와 대북 제재완화를 주고받으면서 한국을 소외시킬 우려가 있다. 트럼프는 “미국이 북한 핵으로부터 안전하게 됐다”고 선전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이 소외된 북·미 협상 결과는 북한의 핵 위협 아래서 미국의 핵우산에 매달려 생존해야 하는 부조리한 구도로 고착할 가능성이 크다.

만약 이런 경우가 되면 한국은 안보구도 자체를 바꾸도록 시도할 수 있다는 카드가 필요하다. 핵 비확산 체제(NPT)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우라늄 농축과 재처리 등 핵 능력을 최대한 발전시키는 계기로 활용하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국방차관으로 내정된 엘드리지 콜비가 자신의 저서 ‘부정의 전략(『The Strategy of Denial』)’에서 제시하듯 트럼프의 미국은 ‘우호적 핵확산’을 통해 동맹국이 일정한 군사적 자립 능력을 갖추도록 할 수도 있다. 동맹의 핵 역량을 확대함으로써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견제망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그 범주에 적합한 동맹국이다.

한국의 대미 투자·수입도 재구성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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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1일 부산 남구 신선대 및 감만 부두 야적장에 컨테이너가 쌓여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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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 마찰과 관세 전쟁과 관련해선 ‘안보와 경제’를 포괄하는 확대된 의제를 들고 미국과 대화해야 한다. 한국은 해외 최대의 미군기지를 건설·유지하면서 미국산 무기를 세 번째로 많이 수입하고, 대중 전선 구축의 최전방에 서 있다. 게다가 어느 나라보다 많이 미국 내에서 일자리를 만들고 있다. 트럼프라 하더라도 이런 한국에 대해 특별히 불리한 관세와 무역 정책을 동원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는 이미 바이든 시절 있었던 한국의 대미 투자나 일자리 창출 실적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자신이 받아낸 것을 부각시키는 데 집중하는 성향이다. 이를 고려해 우리 정부는 기존의 대미 투자와 수입 계획을 재구성(refashioning)해 트럼프의 욕구에 부응하도록 대비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동안 미국은 세계경제의 50%를 차지했다. 지금은 25% 수준으로 줄었다. ‘트럼프 현상’은 미국이 강해져서가 아니라 약해진 탓이다. 트럼프가 강력한 군사력 건설을 주창하지만, 미국 국민 다수는 고립주의 성향을 보이면서 군사비 증액을 원치 않는다. 미국이 국내의 난제들을 넘어 중국과 러시아를 제어하려면 기존의 동맹체제를 더 단단하게 유지하는 길이 불가결의 선택이다. 한국은 그 핵심 구성인자다.

한·미 관계는 미국의 어느 동맹 못지않게 상호 보완성이 강하다. 한국은 대통령 탄핵 이후 대행 체제에 있다고 해서 주눅들 만큼 취약하지 않다. 다만 좀 더 큰 차원에서 주고받는 자세로 동맹 관계를 발전시키는 전략이 있어야 한다. ‘트럼프의 미국’과 잘 지내기 위해서도 당당한 입장과 전략적 사고로 임하면서 호혜적인 관계를 구축하기 바란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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