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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5 (일)

[광화문]국가의 운명, 인재의 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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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누구인가보다 당신이 어디에 사는가가 더 결정적이다." 경제적 격차가 지리적 격차에서 기인한다는 엔리코 모리티 교수(UC버클리, 경제학)가 저서 '직업의 지리학'에서 말한 핵심 주장이다. 같은 일을 한다고 해도 어느 지역에 사느냐에 따라 소득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는 실리콘밸리처럼 혁신(첨단기술) 부문이 발달하고 생산성이 높은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의 차이를 비교한다. 부유한 주의 고졸과 가난한 주의 대졸 임금이 역전될 수 있음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혁신은 주주와 임직원이 누릴 경제적 지대를 창출하고 이는 의사,변호사, 교사, 미용사, 간호사, 배관공, 목수, 웨이터 등과 같은 지역적 서비스 종사자들의 일자리와 소득에 영향을 미친다. 첨단기술 부문의 일자리 하나는 비첨단기술 부문의 일자리 여러 개를 만들기 때문에 미숙련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최선의 방법은 첨단기술 기업을 유치하는 것이 된다.

모리티 교수가 미국을 대상으로 연구했지만, 동일한 논리를 국가와 국가 간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예컨대 한국 의사와 인도 의사, 한국 변호사와 미국 변호사 등의 급여 수준을 견줘 보는 것이다. 지역적 서비스의 생산성은 비약적으로 높아지기 어려우므로 거주국가는 소득을 가르는 관건이 된다. 능력치가 비슷하다고 전제했을 때, 서비스직 종사자가 더 많은 급여를 원한다면 첨단기술 부문이 번성하는 국가로 옮기는 것이 '합리적 선택'이 된다.

첨단기술 부문에 요구되는 학력과 스킬, 경험과 전문성을 갖춘 경우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이주하는 순간 연봉이 달라진다. 판교에서 실리콘밸리나 시애틀, 오스틴 혹은 보스턴으로 가는 사례를 떠올리면 된다.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분야의 엔지니어들은 국경을 넘나든다. 이는 인도의 최상위권 수험생들이 상대적으로 국경이라는 한계를 넘기 힘든 의대보다 인도공과대학을 가는 이유다. 언어장벽도 없으므로 미국이나 영국, 싱가포르 등으로 가는 것이 더 나은 경제적 지위를 얻는 길이다.

이런 인재의 이동이 집적되는 곳은 점점 더 매력적인 국가가 된다. 첨단기술 부문의 인재들은 서로 사회적 상호작용을 하면서 더 창의적이고 더 혁신적인 사람이 된다. 이 부문의 승수효과로 지역적 서비스 종사자들의 일자리가 늘어나고 임금도 높아진다. 성공이 더 많은 성공을 낳는 선순환이 이뤄진다. 최고의 인적 자본을 끌어 모으는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 간의 간격은 더 벌어진다.

전자의 아시아 사례로 싱가포르를 들 수 있다. 싱가포르의 IMF 기준 2023년 1인당 GDP는 9만1100달러(한국 3만3390달러)로 세계 5위다. 지정학적인 이유로 홍콩을 떠난 금융· IT기업은 아시아태평양 헤드쿼터를 싱가포르로 옮기는 경향이 두드러져 왔다. 일자리가 많으니 대학에도 인재가 몰려든다. 영국 QS 기준 2024년 세계 대학순위에서 싱가폴국립대는 아시아 1위(세계 8위)다. 2000년 한국과 싱가포르의 1인당 GDP는 각각 1만2726달러, 2만3582달러로 1.85배 차이였지만 2.7배 차이가 난다.

한국의 우수한 학생들이 의대로 가는 것보다 더 걱정해야 하는 것은 두뇌가 빠져 나가는 것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추산 10년간(2013~2022년) '이공계 학생 유출'은 약 34만명(석박사 9만6000여명)이다. 이 시기 연 3000명이었던 의대정원의 10배가 넘는 수치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등의 인력 이탈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번영을 위해 정치와 정부가 할 일은 국가를 첨단기술의 중심지로 만드는 것이다. 3D 업종에 필요한 노동인구를 유입시키는 이민정책이 아니라 첨단기술 기업을 끌어 오는 정책을 펴는 것이다.

한국이 자석 역할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산업 중 하나가 반도체라면, 국회가 반도체특별법을 통과시키지 않는 것은 미래세대의 밥그릇을 걷어차는 것이다. 이는 국가의 운명에 지배되지 않으려는 개인들의 탈주를 가속화시킬 것이다.

머니투데이



강기택 산업1부장 acekang@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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