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고물가 장기화에 중고를 찾는 사람들
요즘 세상에 이 가격? 지난 31일 낮 12시쯤, 서울 종로구 동묘시장. 호객 행위에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돌아봤다. 유명 스파 브랜드의 뽀얀 베이지색 누빔 쇼트 패딩이 눈에 들어온다. 정상가 7만9000원, 여기선 1만원. 입어보니 도톰하다. 그러나 너무 싸다. “이거 구제예요?” 물었다. 13년째 이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는 사장 김모(58)씨의 답. “요즘은 그렇게 부르면 안 돼. 빈티지여, 빈티지!”
지난 30일 오전 서울 동묘시장에서 행인들이 옷을 고르고 있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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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일 오전 서울 동묘시장에서 행인들이 옷을 고르고 있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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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舊製·빈티지)가 인기다. 팍팍한 생계 탓이라고들 한다. 고물가가 이어지면 의류 지출부터 줄이기 마련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해 3분기 가계 동향 조사에 따르면 의류·신발 지출은 전년 동기보다 1.6%p 감소한 11만4000원으로 전체 소비 지출 중 비율(3.9%)이 역대 최저다. 그 와중 최근에야 그나마 활기를 띤 곳이 구제 업계. 중장년층이 주로 찾던 동묘 구제 시장에 20~30대가 늘어가고, 중고 거래 앱도 날이 갈수록 활황. 전문가들은 “고물가 초기에는 옷과 같은 비필수재 소비에 아예 지갑을 닫지만 그 여파가 지나치게 장기화하고 있다”며 “아예 사지 않을 순 없다 보니 조금이라도 값싸고 좋은 제품을 찾으려는 것”이라고 한다. 고민하다 결국 샀다. ‘구제’ 아니고 ‘빈티지’인 쇼트 패딩.
◇이러다 설빔도 구제로 사겠네
“샤쓰 한 장에 3000원? 두 장은 5000원만 줘~.” “자, 새것 같은 구제~.” 한 해 마지막 날, 동묘시장 골목골목은 발 디딜 틈 없이 빼곡. 상인들은 “2년 전엔 사람들이 물건을 사지도, 버리지도 않아 죽을 맛이었다”며 “그나마 순환이 돼 좀 나아진 것”이라고 했다. 구제 시장의 옷들은 동네마다 설치된 의류 수거함 등에서 온다. 전문 업체가 아파트나 주택가를 돌며 매입하기도 한다. 수선과 세탁을 거쳐 재단장하면 새 옷 부럽지 않게 때깔이 고와진다고.
최근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 또 있다. 장·노년층이 핵심 고객이던 이곳에 젊은층이 많이 온다는 것. 한 상인은 “예전에도 젊은 친구들이 오긴 했지만 아는 사람만 왔다. 귀신처럼 옷을 골라가 딱 보면 선수인 걸 안다”며 “근데 최근엔 10명 중 3~4명이 젊은이”라고 했다. 또 다른 50대 상인 장모씨도 “전엔 데이트한다고 구경만 했는데 요즘은 ‘싸다’면서 두세 벌씩 사 간다”고 했다.
지난 30일 오전 서울 동묘시장에서 행인들이 옷을 고르고 있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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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링 등을 백팩에 주렁주렁 매달고 신중하게 옷을 고르는 20~30대가 매장마다 보였다. 단순히 ‘싼 옷’이 아닌 ‘낡고 오래된 느낌이 나지만 트렌디한 옷’ 혹은 ‘새것 같은 중고 브랜드 의류’를 찾는다. ‘여성 의류 1만원’이라 적힌 옷걸이에는 검은색 나이키·아디다스 등 패딩이, 그 옆 ‘5만원’짜리 걸이에는 남색 리바이스·내셔널지오그래픽 등의 점퍼가. 원가는 10만~30만원이다.
하이라이트는 ‘보물 찾기’. 옷걸이 말고 가판대나 바닥에 수북한 ‘옷 무덤’을 뒤집으며 값싸고 트렌디한 보물 같은 옷을 찾는다는 의미다. 1만원·5만원 등의 가격이 적혀 있지 않아 잘만 하면 5000원 안팎으로도 흥정해 챙길 수 있는데, 간혹 선별되지 않은 고오~급 옷이 섞여 있어 이렇게 불린다. 헤드셋을 목에 건 직장인 곽근주(35)씨는 1000원짜리 컵떡볶이를 들고는 “점심밥 거르고 왔다”며 “연말이라 돈 쓸 곳은 많은데 월급은 그대로니 여기서라도 손실을 만회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맞는 말. 이런 추세면 곧 설빔도 구제로 사게 될 것 같다.
◇이곳에선 누구나 ‘큰손’
“13만원!” 엥? 여기서 들릴 가격이 아닌데. 알고 보니 ‘수입 구제’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매장이란다. 정가 70만원짜리 국방색 후드 집업 가격. 물론 ‘에누리’ 가능.
구제 시장을 찾는 젊은 층이 늘며 20~30대만 겨냥한 매장도 동묘시장에 속속 생기고 있다. 가게에서 신명나는 힙합이 들리거나 ‘월요병 환자를 위한 연말 세일’ ‘소셜미디어 팔로하면 1000원 할인’ 등 문구를 내거는 식. 가격대 있는 브랜드의 구제를 취급하는 만큼 10만~20만원대로 주변보다 비싸지만 백화점 정가에 비하면야. 10대 딸 2명을 데리고 온 40대 여성 황모씨는 “애들이 자꾸 브랜드 옷을 사 달라고 졸라서 ‘요즘은 새 옷보다 빈티지가 더 인기’(라고 꼬셨다며 귀띔)…”라며 “여전히 부담이긴 해도 3분의 1, 4분의 1 가격에 니트나 후드 집업을 살 수 있으니 부담이 훨씬 덜하다”고 했다.
지난 30일 오전 서울 동묘시장에서 행인들이 옷을 고르고 있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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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의 인기는 구제 시장뿐 아니라 중고 거래 앱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데이터 플랫폼 기업 모바일인덱스에 따르면 ‘당근마켓’ 이용자는 지난해 11월 기준 1746만명으로 전년 동기(1671만명)보다 늘었다. ‘번개장터’는 271만명에서 280만명으로, ‘중고나라’는 83만명에서 91만명으로 증가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구제는 남이 쓰던 제품이 아니라 ‘오래돼 더 가치가 있는 제품’이라는 인식 변화와 고물가가 맞물리며 생긴 현상”이라며 “이 추세라면 브랜드나 명품을 저렴하게 구입하려는 경향이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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