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박물관에 ‘오트 쿠튀르’ 의상 11벌 기증… 김지해 디자이너
지난 11월 11일 서울공예박물관에서는 ‘기증 감사의 날’ 행사가 열렸다. 올해 총 1만9469점의 공예자료를 기증한 기증자 26명 중 대규모 컬렉션 기증자 9명에게 서울시장 명의 표창장을 수여하고 ‘기증자의 벽’에 명패를 헌정하기 위해서다. 이날 금속·나무·도자공예 등 수많은 기증품 중 단연 눈에 띈 것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패션 디자이너 김지해씨의 오트 쿠튀르 의상 11벌이었다.
쿠튀르 의상은 문화작품
가사(스님이 입는 법의의 일종)를 닮은 독특한 옷은 김지해씨가 직접 디자인한 옷이다. 김상선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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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의 도시 파리에선 매년 두 차례씩 큰 패션쇼가 열린다. ‘프레타 포르테’와 ‘오트 쿠튀르’ 컬렉션 쇼다. 프레타 포르테는 기성복 브랜드들이, 오트 쿠튀르는 고급 맞춤복 브랜드들이 참여한다. 오트 쿠튀르는 파리의상조합의 명칭이기도 한데 샤넬, 디올, 발렌티노 등 20여 개 정도의 디자이너 브랜드만 참여한다. 프랑스 디자이너들이 자신들의 실력을 뽐내고 자부심을 드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무대라 외국인 디자이너나 브랜드가 함께하기는 쉽지 않다. 정식멤버든 초청멤버이든 의상조합원들의 만장일치가 기본 조건. 김 디자이너는 1999년 자신의 브랜드 ‘지해(JI HAYE)’를 론칭하고 2년 만인 2001년 7월 동양인으로는 두 번째,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오트 쿠튀르 초청멤버로 선정됐다. 당시 김씨의 컬렉션을 본 프랑스의 유력지 르 피가로는 “겐조와 파코 라반의 공백을 메울 디자이너”라는 찬사를 보냈다.
이번에 기증한 11벌의 옷은 바로 이 오트 쿠튀르 무대에 선보였던 의상들이다. 모시, 노방 등의 한국 전통 소재를 사용하고 ‘깨끼’ ‘세땀뜨기’ ‘충무누빔’ 등 우리만의 바느질 기법을 적용해 만든 옷들이다. 기와지붕의 선, 봉황의 날갯짓, 단청의 조화로운 색 조합도 옷에 넣었다. “처음 본 디테일에 유럽 사람들은 천상의 옷이라고 찬사를 보내고, 한국 사람들은 ‘분명 서양식 드레스인데 한복이 연상된다’고 했죠. 저는 그 말이 너무 좋고 감사해요. 제가 의도한 것을 정확히 꿰뚫어 본 찬사니까요.”
사선으로 기와지붕의 ‘선 자연’을 표현했다. 부드러운 노방 천도 깨끼바느질(투명 옷감을 시접이 보이지 않게 최대한 가늘게 박는 기법)을 활용하면 풍성한 볼륨을 만들 수 있다. [사진 김지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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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는 옷에 관심이 없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방을 팽개치고 친구들과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는 걸 더 좋아했다. 그의 운명을 바꿔놓은 건 일본 유학이었다. 재일교포인 아버지는 한국으로 여행 왔다가 어머니를 만나 가족을 꾸렸지만 양가의 반대에 부딪혀 일본 가족들과 왕래를 끊고 지냈다. 고교 졸업 후 아버지의 유언을 들고 일본의 친척들을 찾아갔지만 문전박대 당했다. “아버지의 삶을 대변하기엔 제 일본어 실력이 너무 형편없어서 답답했죠. 한국에 돌아온 후 비용을 벌어서 일본으로 유학을 갔죠. 어느 날 거리에서 다 찢어진 바지를 옷핀 수십 개로 이어놓은 독특한 차림의 청년을 보고 ‘아, 옷을 만들고 싶다’ 결심했어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 디자이너 요지 야마모토, 이세이 미야케 등이 다녔던 문화복장학교에 들어갔고 2년 만에 조기졸업했다. 늘 “지해 옷은 살아 있다”고 칭찬해준 부원장이 “프로가 되라”며 회사까지 소개해줬다. 대형마트에서 유통되는 옷을 만들던 회사는 프랑스에 지사가 있었고, 덕분에 파리에 머물게 된 김 디자이너는 더 큰 물을 만나기 위해 퇴사 후 프리랜서로 일했다. 포트폴리오를 본 프랑스의 유명 디자이너 꼼 데 가르송도 함께 일하자고 먼저 제안했지만 동양의 이름 없는 작은 나라에서 온 여자에게 정식으로 입사를 제안하는 곳은 없었다.
사선으로 기와지붕의 ‘선 자연’을 표현했다. 부드러운 노방 천도 깨끼바느질(투명 옷감을 시접이 보이지 않게 최대한 가늘게 박는 기법)을 활용하면 풍성한 볼륨을 만들 수 있다. [사진 김지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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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무너진 그는 1998년 무작정 히말라야로 날아갔다. 석 달 동안 에베레스트 6300m 베이스캠프까지 오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그는 여전히 등산을 좋아한다. 산악인 고 박영석 대장과도 절친이었다). “어느 날 햇살 속에서 옷을 깁고 있는 티베트 노인을 봤어요. 저렇게 행복한 표정으로 옷을 만질 수도 있구나 각성이 됐죠. 남에게 보여주는 옷이 아니라, 산처럼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오는 진짜 옷을 만들자 결심했죠.”
그는 6개월 간 한국에 머물면서 ‘나만의 옷’이 될 수 있는 요소들을 찾았다. 화가이기도 한 매니저 펠릭스 부코브자의 조언 때문이다. 화가이기도 한 그는 ‘지해’를 시작하기 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인데 김 디자이너가 어떤 옷을 만들까 고민할 때면 늘 “특히 프랑스는 너의 독특한 생각을 보고 싶어해. 너의 손을 통해 한국을 그려보라” 조언했다.
요르단 왕비, 고어 부인도 ‘지해’의 고객
울 소재에 은박 봉황을 찍어 만든 재킷과 바지. [사진 김지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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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만의 옷을 만들고 싶다고 했더니 펠릭스가 그러더군요. ‘집으로 비유하면 중국은 화려하지만 과장됐고, 일본은 너무 완벽해서 숨을 못 쉬겠고. 하지만 한국의 집은 만져보고 싶고 살고 싶게 하는 뭔가가 있다. 그걸 찾아보라’고. 히말라야에서 돌아와 6개월 동안 한국의 박물관, 고궁, 사찰을 돌아다녔고 틈만 나면 동대문 시장 포목점에서 살았죠. 당시 동대문 광장시장 1, 2층 전체에 한복집이 죽 있었고 집마다 수십 년 간 일 해온 바느질·재단 장인들이 계셨어요. 그 할머니들 일하는 걸 지켜보면서 궁금한 걸 물어봤어요. 나는 한복 디자이너는 아니었지만 우리 전통 소재와 전통 바느질에 유럽에는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걸 배우고 싶었던 거예요.”
평생 저고리만 만든 할머니, 자수만 놓은 할머니, 금박만 찍는 할머니가 모두 선생님이었다. “그때서야 떠오르더라고요. 우리 어머니는 1년 내내 집안 일로 종종걸음 치셨지만 절에 가실 때만큼은 한 달 전부터 옷 준비를 정성스럽게 하셨죠. 벽장 속 한복을 꺼내 빨아서 풀을 먹이고 다듬이로 잘 두드려서 밟고 볕이 좋은 날 널어 말리기를 반복하셨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머니가 집을 나설 때가 기억났어요. 내가 만드는 옷에도 이런 엄마의 마음을 담아야겠구나 생각했죠.”
처음 만든 옷 10벌을 들고 펠릭스 지인의 소개로 유명 패션 디자이너 아제딘 알라이아(2017년 별세)를 찾아갔다. 자신의 쇼 옷을 만드느라 정신 없던 그가 김씨의 옷을 보고 옆에 있던 피팅 모델에게 입히더니 “재킷이 정말 만들기 어려운 옷이다. 그래서 누가 봐도 구분할 수 있을 만큼 디자이너의 개성이 잘 드러난다. 생 로랑의 재킷, 디올의 재킷, 알라이아의 재킷이 있는데 너는 너의 재킷을 벌써 만들었구나” 칭찬했다.
0.3㎝ 간격으로 세밀하게 놓는 ‘충무누빔’으로 선의 미학을 살린 코트. [사진 김지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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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 쿠튀르 초청멤버가 되면서 다양한 미디어에 소개됐고 오트 쿠튀르를 찾는 고객들의 눈에도 띄었다. 레바논의 부호이자 셀럽인 무나 어유브, 요르단의 라니아 왕비, 엘 고어 부통령의 부인이 ‘지해’의 고객이 됐다. 쿠튀르 의상의 가격은 상상 초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나 ‘돈으로 따질 수 없는 문화 작품’이라는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다. “동대문에서 한 마에 2500원 하는 노방 천으로 만든 옷을 1억원에 팔다니, 말도 안 된다 하겠지만 다이아몬드도 동네 보석상에서 가공하는 것과 까르띠에가 가공하는 것은 가치가 다르죠.”
2002년 봄·여름 오트 쿠튀르 컬렉션에선 ‘한일월드컵’을 기념하는 의미로 축구공 문양의 파격적인 드레스를 선보여 전 세계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2003년에는 미스유럽 선발대회에서 상위 입상자 5명의 의상을 만들었다. 한국인 디자이너가 세계 미인대회 의상 디자인을 담당한 것은 처음이다.
김 디자이너는 이제 오트 쿠튀르 걸렉션 참가에 더 이상 미련이 없다고 했다. “나이 60을 넘고부터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어요.” 이번 서울공예박물관 기증도 그 연장선에 있다. “본격적으로 우리 장인들의 솜씨를 유럽에 알리고 싶어요. 한복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고 또 많은 부분을 빌려온 만큼 그 우수한 기술과 좋은 소재들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래요. 그러려면 국내외에 이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알려야 할 것 같아서 박물관 기증을 결심했어요. 향후 상설전시나 기획전을 통해 우리 할머니들의 솜씨도 충분히 명품이 될 수 있음을, 한복을 드레스로도 풀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요. 한복뿐 아니라 한국 장인들이 만든 전통 공예품도 파리에 소개하고 싶고. 한국과 프랑스 장인들의 협업으로 새로운 창작품을 탄생시켜 세계 주요 도시에서 초청전시도 열고 싶고. 앞으로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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