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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7 (화)

대한늬우스 장식한 첫 한국인 콩쿠르 우승자 한동일…고국에서 연주한 인생 마지막 악장 [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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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콜+] 향년 83세로 별세... 피아니스트 신수정 "한동일은 우리 시대 아이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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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SBS 문화예술전문기자가 전해드리는 문화예술과 사람 이야기.


며칠 전이지만 이미 '지난해'가 되어버린 2024년 12월 30일 저녁. 서울 서초구 모차르트홀의 송년 음악회인 '겨울 나그네' 공연은 피아니스트인 신수정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의 인사로 시작되었습니다. 신수정 회장은 바리톤 박흥우 씨와 2004년부터 매 연말에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함께 공연해 왔습니다.

'겨울 나그네' 20년을 회고하며 송년 인사를 건넨 신수정 회장은 피아니스트 한동일 씨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한동일 씨는 이 공연 바로 전날인 12월 29일 밤, 향년 83세로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두 사람은 1952년 전쟁 중 부산에서 열렸던 제1회 이화 콩쿠르에 함께 출전했던 인연이 있습니다. 나이도 동갑이고, 오랫동안 우정을 나눠온 음악 친구였습니다. 신수정 회장은 생전에 고인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고인을 추모했습니다. 이 사진에는 1952년 이화 콩쿠르에서 함께 입상했던 '피아노 대모' 이경숙 연세대 명예교수도 함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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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이화 콩쿠르 입상자. 왼쪽부터 이경숙, 한동일, 신수정. 사진 출처 :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구술총서 신수정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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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떠나간 '겨울 나그네'



"바로 그저께도 문자를 받았어요. 제 공연에 오려 했는데, 기침이 나고 감기가 심해져서 못 갈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 상태가 나빠져서 응급실까지 갔다는데 그만......"

'겨울 나그네'는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절망한 젊은이가 눈보라 치는 겨울에 여행을 떠나 겪는 일을 그려낸 연가곡입니다. 슬프고 쓸쓸하지만 그 슬픔 속에서 영혼의 위안을 얻게 되는 곡이기도 하죠. 원래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지만, 이날 '겨울 나그네' 연주를 들으며 저는 여러 번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 '겨울 나그네'는 이 겨울에 먼 길을 떠난 고인에게 오랜 음악 친구가 헌정한 추모의 연주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전에 신수정 회장이 '한동일은 우리 시대 아이돌 같은 존재였다'고 얘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예술원 회원 구술회고록에도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한동일 선생은 그 당시에 우리는 감히 쳐다보지 못할 천재 소년이었어요.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일찍 카네기 데뷔를 했던, 우리나라의 아주 큰, 정말 1세대 국제적인 피아니스트였어요. 레벤트리트 콩쿠르도 1등 하고, 유럽 연주 여행도 하고. 이런 거 우리는 뉴스를 접하면서 정말 부러워했어요. 물론 우리나라에 와서 연주할 때 인기도 지금의 조성진, 임윤찬 수준을 넘는 거였어요. 그 당시에는 더군다나 많지 않았기 때문에요."





저는 2005년 고인이 고국으로 돌아와 울산대 교수로 부임했을 때 울산에 가서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제가 만난 가장 인상적인 인터뷰이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당시 이미 환갑이 지난 나이였지만 밝고 활력이 넘쳤고, 꾸밈없고 순수한 젊은이 같다고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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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리포트 <한동일 당시 울산대 음대 학장 인터뷰... "인생의 3악장은 고국에서">

안 그래도 얼마 전 그가 서울에서 지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나니 마음이 헛헛합니다. 그래서 오래 전이지만 그의 인터뷰를 토대로 그의 삶을 돌아보려 합니다.

1악장 한국. 음악 신동



피아니스트 한동일은 194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습니다. 3살 때부터 팀파니스트였던 아버지에게서 피아노와 작곡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가족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피아노가 없어 서울대 의대 자리에 있던 미 5공군 사령부 강당의 피아노로 날마다 연습했습니다.

12살이 되던 1953년, 그의 연주를 본 미 5공군 사령관 앤더슨 중장이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일본과 한국 전역의 미군기지를 다니며 공연했습니다. 미군 병사들이 철모를 돌려 1달러, 2달러씩 모은 돈이 5천 달러. 이 돈은 그의 유학 자금이 됐습니다.

1954년 6월,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앤더슨 중장의 미 군용기가 여의도 비행장에서 이륙했습니다. 13살의 소년 한동일도 이 비행기를 타고 미국 유학길에 오릅니다. 부모님은 이별이 아쉬워 눈물 흘렸지만, 어린 그는 마냥 가슴이 뛰었습니다. "이제 풍요롭고 넓은 세상을 보게 된다! 마음껏 음악 공부를 할 수 있다!"

2악장 세계. "동양의 모차르트"



중간 경유지를 몇 군데인가 거쳐 1주일 만에 미국 뉴욕에 도착했습니다. 미국 언론들은 '전쟁과 가난으로 신음하고 있는 나라에서 온 음악 신동'이라고 대서특필했습니다. 수많은 스타들이 거쳐 간 TV 버라이어티 쇼인 '에드 설리번' 쇼에도 출연했습니다. 그는 뉴욕에서 생전 처음으로 서양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관람했습니다. 뉴욕 필하모닉의 연주회.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과 피아노 협주곡 4, 5번. 음 하나하나를 마음속에 새겼습니다. 앤더슨 중장의 주선으로 줄리어드 예비학교에 입학합니다. 프로코피에프니, 라흐마니노프니, 스크리아빈이니, 하는 작곡가 이름도 뉴욕에서 처음 들었습니다.

1956년, 카네기홀 데뷔 무대에서 뉴욕 필하모닉과 협연합니다. 한국에서 온 천재 소년은 계속해서 활동 영역을 넓혀갔습니다. 그가 세계 유명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때마다 한국의 이름이 알려졌죠. 1962년에는 케네디 대통령 초청으로 백악관에서 연주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한국의 유일한 클래식 '국가대표'였습니다. 그의 연주회 소식은 대한뉴스의 주요 기사이기도 했습니다.

1965년에는 레너드 번스타인이 심사위원장이었던 24회 레벤트리트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했습니다. 번스타인으로부터 '동양에서 온 모차르트'라는 극찬을 들었지요. 한국인이 국제적인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한국에선 온 나라가 들썩거렸습니다. 그의 도미 성공담은 가난과 피폐에 찌들었던 시절,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꿈이요 희망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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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케네디 미국 대통령 초청 백악관 연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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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성공 뒤에는 고독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와 헤어져 살았고, 돈을 벌어야 했기에 전 세계를 돌며 수많은 연주를 했습니다. 낯선 타국 생활의 외로움은 그를 떠나지 않았고, 계속되는 순회 연주의 스트레스는 점점 커져갔습니다. 그는 유럽 순회 공연 도중 공황 장애를 겪었다고 고백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1969년 인디애나 주립대 교수가 되면서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됩니다. 런던에서 만난 프랑스계 여성과 결혼해 슬하에 세 자녀를 두었습니다. 여러 대학을 거쳐 1987년부터는 보스턴 음대에 재직했습니다.

그리고 2004년 6월 1일. 그가 미 군용기를 타고 유학길에 오른 지 꼭 50년이 되는 날.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도미 50주년 기념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미국에서 처음 봤던 뉴욕 필 연주회 프로그램을 재현해 그날의 감동을 되살렸습니다.

그를 맨 처음 음악의 세계로 이끌었던 부친 한인환 옹이 91살의 나이에 팀파니를 연주하며 아들과 한 무대에 섰습니다. 부친은 서울시향의 창립 멤버로 오랫동안 타악기 연주자로 활동하다 은퇴한 지 오래였습니다. (한인환 옹은 그로부터 몇 년 후인 2009년 별세했습니다.) 감회 가득한 무대, 지휘를 맡은 이대욱은 오래전 한국에서 그를 가르쳤던 김성복 선생의 아들이기도 했습니다.

이 공연은 그의 인생에 또 다른 전환점이 됐습니다. 공연이 끝난 후 그는 이제 한국에 돌아와야 할 때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철들고 나서 거의 평생을 미국에서 살아왔지만, 언제부터인가 미국이라는 나라가 '외국'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그는 인터뷰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김치 피'로 지칭했습니다.

"김치 피를 갖고 한 번 태어나면 어디 가도 그 김치 피는 변하지 않는 거예요. 잠깐 잊을 수는 있겠지만 떠나지 않고 돌아와서 날이 갈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이 김치 피는 강해집니다. 그게 자연인가 봐요. 조국이 그리워지고, 한국의 아름다움을 다시 보게 됩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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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악장 한국. "김치 피는 강해진다"



2004년 말, 그는 17년 넘게 재직했던 보스턴 음대에 사표를 썼습니다. 한국에 돌아오기 위해서였습니다.

"미국. 좋은 교육을 받을 기회를 주고, 일자리도 주고, 50년 동안 나를 키워준 나라. 당신에게 감사한다. Thank you very much. 이제 나는 내 고향 한국으로 돌아간다."

귀국한 그는 2005년부터 울산대 음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당시 그의 레슨을 취재했는데, 학생을 가르치는 그의 모습에는 열정이 넘쳤습니다. 그는 조국에 돌아와 가르치는 제자들이 한 명 한 명 다 소중하고 대견하다고 했습니다. 이 학생들을 잘 가르쳐 세계 무대에 알리고 싶다고, 그리고 지금껏 자신을 성원해 준 조국에 빚을 갚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가 울산대에 간 걸 두고 왜 하필이면 지방대냐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역사가 짧은 지방 학교에서 더 큰 희망을 본다고 했습니다. 이미 다 갖춰져 있는 학교에서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나가는 즐거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외국에서도 수많은 학생들을 가르쳐 봤지만, 이들은 더욱 특별하다고 했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새 삶을 사는 듯한 활력을 느낀다고도 했습니다.

"인생, 참 쉽지 않아요.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어요. 제일 힘든 게 외로움이었어요. 어릴 때부터 부모와 헤어져 미국, 유럽에서 혼자 지냈죠. 상처도 없다고 말 못 해요. 이제는 평화를 찾았어요. 외롭지 않아요. 학생들을 통해 내 가정을 찾았어요. I have a family."

그는 당시 환갑이 넘은 나이에 조국에 돌아와 '인생 3악장'을 쓰고 있다고 했습니다. 외국에서 50년을 사느라 잘 모르고 지냈던 한국의 역사와 예술, 전통문화를 이제부터라도 배워나가겠다며, '마치 오리엔테이션을 받는 신입생처럼 느껴진다'고 했습니다. 그는 저와 했던 인터뷰에서 '인생 3악장은 끝이 아니다. 4악장도 이어진다'며,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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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문화전문기자 shki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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