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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7 (화)

미술품 가격은 낮게 시작할수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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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뉴질랜드 여행 중 두 딸을 위해 당시 몇십만원을 주고 샀던 케빈 맥밀런의 수채화. 한 도시의 작은 갤러리에서는 현지 작가의 작품을 10만원대부터 100만원대까지 판매하고 있었다. 이승현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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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은 미술 작품이 너무 비싸 살 엄두를 못 낸다. 우리가 이름을 알 만한 유명작가의 작품은 대부분 수억원대 이상이고, 젊은 작가의 작품도 수백만원에서 1천만원에 육박해 선뜻 지갑을 열기에는 여전히 만만치 않은 가격이다. 다른 선진국보다 비싸다고들 하는데, 왜 우리 미술품 가격은 이렇게 형성된 것일까? 그리고 이 가격은 과연 적정하고 좋은 걸까?



한국전쟁 이후 최빈국이던 우리는 1990년대 후반에 비로소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를 돌파했고, 그 이후 약 10년 간격으로 2만달러, 3만달러를 넘어서면서 최근에야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다.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도 쉽지 않았던 시절에 미술 작품을 살 수 있는 여유는 극소수 부유층만 가질 수 있었고, 그 외 대다수는 아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데 일본 유학생 출신, 해방 이후에는 대학 출신으로 형성된 초기 화단은 작가들 스스로 양반 내지 상류층이라는 신분 의식을 갖게 했다. 미술품 가격은 자연스레 구매력이 있는 이들 부유층의 눈높이에 맞춰 높게 책정됐고, 고가의 작품은 이런 작가들의 자존심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뉴질랜드에서의 경험







우리는 대단한 갑부들만 작품을 소장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간송 전형필이나 이건희 등 알려진 소장가는 당대의 갑부들이었다. 그러나 미술시장을 건강하게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소소한 작품을 구매하는 다수 소장가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단지 자신의 부를 과시하고 싶은 졸부들이나 시세차익을 노리고 작품을 구매하는 투자자들은 억대의 고가 작품을 선호하지만, 좋아하는 작품을 아껴서 곁에 두고자 하는 소장가들에게 작품의 가격은 낮을수록 좋다.



예를 들어 필자는 가족과 뉴질랜드를 여행하며 몇십만원을 주고 작품을 한 점 구매한 경험이 있다. 당시 그 도시의 작은 갤러리에서는 그곳에 거주하는 작가의 작품을 10만원대부터 100만원대까지 판매하고 있었다. 같은 도시의 제법 큰 미술회관에서도 소장 작가들의 작품을 저렴한 가격에 위탁판매해서 부담 없이 믿고 살 수 있었다.



한번 그렇게 작품을 사고 나니 한국에서 느꼈던 갤러리의 높은 문턱이 사라지면서 자연스레 다른 도시에 가서도 그곳의 갤러리를 들러보게 됐다. 맘에 드는 작품이 있으면 작가와 작품에 대해 주인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눴다. 당시에 어린 두 딸을 생각하고 샀던 두 여자아이의 뒷모습을 그린 그림은 지금도 한 아이의 방에 걸려 있다.



상업 갤러리에 들어가서 물어본 작품의 가격이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씩 한다면 누구든 주눅부터 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경험이 쌓이면 자연스레 미술품 구매는 부자들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이 굳어지고, 갤러리의 문턱이 높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일단 이런 선입견이 생기면, 갤러리에 가서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어도 무엇을 물어야 할지도 모르게 된다. 궁금한 걸 모두 묻자니 혹시 너무 무지하거나 없어 보이는 게 아닐까도 싶고, 이래저래 작품 구매는 어려워진다.



옷이건 취미용품이건 물건을 사다보면 요령이 생긴다. 사면서 그 품목은 어떤 브랜드가 좋고, 어떤 부분을 챙겨 봐야 하는지, 내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등을 알게 된다. 그래서 정말 원하는 걸 정당한 가격에 사는 요령을 깨칠 때까지의 시행착오와 비용을 우리는 ‘수업료’라고 부른다. 미술품도 마찬가지여서 직접 사보면 작품을 살 때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지, 가격의 적정성은 어떻게 판단하는지, 내 예술적 취향은 무엇인지 등을 배우게 된다.



뉴질랜드에서는 마을마다 갤러리가 있었다. 그 갤러리에서 저가의 작품들을 손쉽게 구매해보면서 상대적으로 적은 수업료로 이를 배울 수 있었다. 갤러리에 대한 심리적 진입장벽이 없으니 소득과 부에 따라 자기 수준에 맞는 작품을 편히 골라 구매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서로 취향이 다르기 마련인 다수가 다양한 가격대의 작품을 구매하면서 구매자의 선택 폭은 넓어지고 작품을 판매하는 작가의 층위도 다양해진다. 반면 우리는 작품을 구매할 때 심리적인 진입장벽이 높아 저가에 작품을 사보며 배울 기회가 없다. 그래서 자신이 없으니 비싸더라도 모두가 아는 유명작가의 작품에 수요가 몰린다.



우리는 한국 미술시장에 소장가는 없고 투자자와 딜러만 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몇 달 치 월급, 심지어 몇 년 치에 해당하는 금액을 들여 첫 작품을 사면서 향후 가치보존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게 사놓고도 시장에서 가격변동이 생기면 새가슴이 돼 금방 되팔기 일쑤다. 처음부터 바로 고가의 작품으로 소장을 시작하면 수업료도 비싸지만 본의 아니게 소장가가 아니라 투자자로 내몰린다. 미술품은 원래 보고 즐기기 위해 구입하는 것인데, 즐기기에 너무 과한 금액을 지출하다보니 마치 원래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는 듯이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중산층도 구매할 수 있게







최근에 와서 일반 국민도 생활필수품 이외의 여가나 기호품을 위한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우리 미술품의 높은 가격은 오랫동안 고착화되어 쉽게 내려가지 않는다. 그러나 몇십만원에서 몇백만원의 여윳돈을 가진 중산층에 미술품의 구매 경험을 만들어줘서 시장을 선순환시키기 위해서는 확대된 구매층을 겨냥한 가격 책정이 뒤따라야만 한다. 그래야 수요층이 확대되고, 더 많은 작가에게 전반적인 소득수준 증가의 수혜가 돌아간다. 이는 결과적으로 작가의 저변을 넓혀 미술의 발전에도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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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 미술사학자 shl2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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