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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8 (수)

을사년의 ‘저주’ [유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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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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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들어도 을씨년스러운 1905년 ‘을사년’ 새해 첫날 날씨는 의외로 화창했다. 당대 대한제국의 최고 ‘엘리트’였던 윤치호(1865~1945) 외부협판은 이날치 자신의 영문 일기를 고종에 대한 ‘뒷담화’로 가득 채웠다.



“황제가 자신이 편리하도록 시곗바늘을 움직이고 있다. 어떤 행사, 이를테면 제사가 낮 12시에 시작하도록 예정돼 있다고 하자. 황제는 오후 2시쯤 기상한다. 용변을 보고, 밥을 먹고, 점쟁이(fortune-tellers) 등과 잡담을 나누고 나면, 오후 4시나 5시, 또는 6시가 된다. (중략) 황제는 파렴치하고 거지 같은 허영심 덩어리이다(He is a most shameless bag of beggarly vanities).”



이틀 뒤인 3일치 일기에선 더 암담한 소식을 확인할 수 있다. 1904년 8월부터 시작된 처절한 뤼순 공방전에서 일본이 마침내 승리한 것이다. 일본군은 11월26일 시작한 3차 총공격에서 엄청난 인명 피해를 감수한 끝에 새해 첫날 뤼순의 그 유명한 ‘203고지' 점령에 성공했다. 윤치호의 투덜거림은 이어진다. “뤼순항이 그저께 항복했다. 조선의 운명에도 영향을 끼칠 거대한 사건들이 우리 조선과 랴오둥반도를 분리하는 좁은 바다 건너편에서 일어나는 동안 황제와 대신들은 밤낮으로 유치한 의식, 시시한 음모, 자신들의 지긋지긋한 권력 아래 있는 처참한 수천명의 피를 빨아먹는 일에 매달려 있다.”



이러다 나라가 주저앉을 수 있었다. 보다 못한 면암 최익현(1833~1906)이 일흔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고종 앞에 나섰다. 1월7일이었다. “아, 500년 동안이나 내려온 종묘사직과 삼천리강토가 일본에 의해 망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지금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포로마냥 얽매여 도륙을 당하게 되었는데도 구해내지 못하니. 아! 운명입니까. 시대의 탓입니까. 당장 죽어버려 살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최익현의 우려대로 일본은 그해 11월 을사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국권을 사실상 빼앗게 된다.



윤치호의 투덜거림과 최익현의 울분이 이어졌던 1905년 을사년으로부터 ‘육십갑자’가 무려 두번이나 지났다. 믿기 힘든 일이지만, 2025년 을사년의 풍경은 120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나라 밖에선 우리 “운명에 영향을 끼칠 거대한 사건”들이 쉴 새 없이 이어지는데 게으른데다 “파렴치하고 거지 같은” 대통령은 체포를 거부하며 버티고 있다. 국민들이 똘똘 뭉쳐 ‘을사년의 저주’를 풀어내는 수밖에 없다.



길윤형 논설위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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