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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8 (수)

옐친과 윤석열…아직 기회는 있다 [왜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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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 AP 연합뉴스, 대통령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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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수 | 전 대통령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장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신생 러시아가 출범했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과도기적 상황을 핑계로 비상대권을 발동했다. 그의 권한은 무소불위였다. ‘짐이 바로 국가’였다. 최측근인 비서실장의 얼굴에 술잔을 뿌리고, 술에 곯아떨어져 아일랜드 수상과의 정상회담에도 나타나지 않는 외교적 무례를 범했다. 반란군의 탱크 위에 올라 쿠데타를 저지했던 그의 기개는 온데간데없었다. 날이면 날마다 술독에 빠져있었다. 둘째 딸 디아첸코 부부가 신흥 부호(올리가르히)들과 야합해 국정을 농단했다. 나라와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1990년대 말 북한 주민들만이 ‘고난의 행군’을 겪은 것이 아니었다. 러시아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환율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루블화는 휴짓조각이 됐다. 대형 백화점의 매장은 텅텅 비었다. 국제사회에서도 천덕꾸러기 국가로 전락했다. 냉전의 한 축을 차지했던 ‘슈퍼파워’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말았다.



이 끝없는 추락을 멈출 수 있는 단 한가지 처방은 지도자 교체뿐이었다. 그렇지만 소수의 가신들은 술주정뱅이 옐친을 허수아비로 세워놓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급급했다. 게다가 후계자 지명도 옐친의 변덕 때문에 예측 불가했다. 여러 총리가 물망에 올랐다가 몇개월 만에 쫓겨나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마침내 러시아 경제는 모라토리엄을 넘어 디폴트(파산선고)에 직면했다.



그런 옐친이 20세기의 마지막 날인 1999년 12월31일 전격 하야를 선언했다. 그것도 임기 6개월을 남긴 시점이었다. 후계자도 무명인사였던 블라디미르 푸틴을 지명했다. 전 세계가 놀랐다. 그 후 사반세기가 지났다. 러시아는 과거의 영화를 급속히 회복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16차례의 서방 제재에도 4%의 경제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도 1990년대 후반에 동일한 금융위기를 맞았다. 수습 불능한 상태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김대중 당선자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그리고 최단시일 내 외환위기를 극복한, 전무후무한 나라로 거듭났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당시부터 손바닥에 ‘왕’(王)자를 새기면서 제왕적 권력을 갈망했다. 급기야 지난달 3일 심야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렇지만 국회와 국민의 저항에 부딪혀 2시간 만에 무산되고 열흘 뒤 국회 탄핵이 가결됐다. 이제 남은 것은 헌법재판소의 결정뿐이다. 그렇지만 윤 대통령의 반헌법 혐의는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다. 특히 자신의 절대권력을 의지해온 검찰 수사에서 적나라하게 밝혀졌다. 이러한 과정은 윤 대통령의 폭탄주 탐닉과도 무관치 않다.



삼청동 안가에서 비상계엄을 모의하던 긴박한 상황에서도 폭탄주가 어김없이 돌았다는 진술을 검찰이 확보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다른 보도에 따르면, 대통령 관저의 공식행사에서도, 부산엑스포 유치현장인 파리에서도 폭탄주는 돌고 또 돌았다. 술독에 빠져있던 옐친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탄핵 가결 이후 관저에 칩거한 윤 대통령이 연일 폭탄주에 절어 이성이 마비될 것을 추론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이다. 소수 극우세력에 에워싸인 ‘벌거숭이 임금’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옐친 대통령은 조기 하야를 결단함으로써 자신도 살고 나라도 살렸다. 윤 대통령도 단 1시간 만이라도 온전한 정신과 냉철한 이성으로 자신의 거취를 결정하길 당부한다. 아직 기회는 있다. 그렇지만 빠를수록 좋다. 그래야만 자신도, 국민도, 국가도 트라우마의 회복을 앞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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