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 수괴와 핵심 공범에게서는 아이히만에게 있었던 것, 누군가의 뺨을 때린 일에 대한 자책감조차 찾아볼 수 없다. 윤리적 사유를 촉구하는 모든 기억을 제 편한 대로 망각하는 소시오패스,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반사회적 인격장애 말고 이 우두머리를 설명할 말이 없다.
인간 내면의 분열을 처음으로 그린 그리스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 위키미디어 코먼스 |
그리스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기원전 525~456)의 3부작 ‘오레스테이아’는 오레스테스 가문의 피비린내 나는 혈족 살해를 그린다. 비극의 시작은 트로이 전쟁이다. 그리스 연합함대가 트로이를 정벌하려고 아울리스 항구에 모인다. 그러나 역풍이 불어 배는 떠날 줄 모른다.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에게 진중의 예언자 칼카스가 처녀의 피를 제물로 바쳐야 폭풍이 멈출 것이라고 말한다. 고뇌를 거듭하던 아가멤논은 제 딸 이피게네이아를 죽여 제단에 올린다. 함대가 항구를 떠나려면 다른 수가 없다.
이피게네이아의 죽음은 딸의 어머니이자 아가멤논의 아내인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분노를 격발한다.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아가멤논은 1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딸의 죽음을 잊지 않은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돌아온 남편을 정부 아이기스토스와 공모해 잔혹하게 죽인다.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 ‘오레스테이아’ 제2부는 멀리 쫓겨나 있던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데서 시작한다. 아버지의 원한을 씻으려면 어머니의 피를 뿌려야 한다. 아버지의 혼을 달래려 어머니를 죽여야 하는 딜레마 앞에서 오레스테스의 마음은 두려움과 괴로움으로 흔들린다.
마음을 다잡은 오레스테스는 어머니의 정부 아이기스토스를 응징하고 이어 클리타임네스트라 앞에 선다.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말한다. “어머니의 저주가 두렵지 않으냐, 아들아?” 오레스테스가 답한다. “어머니라니요? 당신은 나를 낳아 불행 속으로 내던졌어요.”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다시 호소한다. “아들아, 너는 이 어미를 꼭 죽이겠다는 거냐?” 오레스테스의 답은 단호하다. “내가 아니라 당신이 당신을 죽이는 거요.” 어머니가 스스로 자신의 악행을 처벌한다는 논리로써 오레스테스는 자신에게 모친 살해의 죄가 없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그런 논리가 내면의 두려움을 억누르지는 못한다.
어머니의 주검 앞에서 오레스테스가 토로하는 말은 영혼을 파먹어 가는 무서운 죄책감을 보여준다. “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치고 벌써 공포가 노래 부르며 격렬한 춤을 추려 한다.” 어머니를 죽인 오레스테스는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복수의 여신들은 오레스테스 안에서 오레스테스를 뒤쫓는 또 다른 오레스테스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는 정당한 믿음과 어머니를 제 손으로 죽였다는 양심의 가책 사이 대립과 충돌이 비극을 마지막까지 이끌고 간다. 이 비극과 함께 인간 내면의 거대한 분열이 처음으로 인류 앞에 나타났다고 독일 고전학자 브루노 스넬은 말한다.
한세대 뒤 에우리피데스 비극에 이르러 내면의 분열은 한층 더 직접적이고 격렬한 것이 된다. 에우리피데스 비극은 분열된 두 인격이 다투는 내적 대결의 장이다. ‘메데이아’의 주인공이 그 분열의 극한을 보여준다. 콜키스의 공주 메데이아는 영웅 이아손을 도와 황금 양털을 얻게 해준 뒤 이아손과 함께 고향을 떠난다. 메데이아와 이아손은 코린토스에 정착해 두 아들을 낳아 기른다. 어느 날 맑은 하늘에 날벼락이 친다. 이아손이 코린토스의 공주와 결혼하겠다고 메데이아에게 통보한 것이다.
버림받은 신세가 된 메데이아는 모욕감을 견딜 수 없어 복수할 길을 찾는다. 가장 큰 복수는 상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메데이아는 마법의 옷을 입혀 코린토스의 공주를 불에 타죽게 하고, 이어 이아손이 끔찍이도 사랑하는 두 아들의 목숨을 거두려 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메데이아 자신이 낳아 기른, 제 분신 같은 존재 아닌가. 메데이아 내면은 분열된 인격의 난투장이 된다. 에우리피데스는 그 난투를 메데이아의 독백으로 보여준다.
메데이아가 탄식한다. “아아! 어떡하지?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을 보니 나는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나는 차마 못 하겠어. 내 이전의 계획들은 다 사라져버려라! 나는 내 자식들을 이 나라에서 데리고 나갈 거야. 아이들의 불행으로 아이들 아버지에게 고통을 주려다가 왜 나 자신이 두배의 고통을 당해야 하지? 그건 안 돼!”
내면의 다른 메데이아가 말한다. “내가 잘못된 것 아냐? 원수들을 응징하지 않고 놔두어 웃음거리가 되겠다는 거야? 해치워야 해! 부드러운 말에 마음이 솔깃해지다니 나야말로 얼마나 비겁한가!” 그러다 다시 마음이 뒤집힌다. “내 마음이여, 너는 절대로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돼! 가련한 마음이여, 아이들을 살려줘!”
마지막에 메데이아는 마음을 한번 더 뒤집는다. “아니야! 복수의 악령들의 이름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내 자식들을 원수들에게 넘겨주어 웃음거리가 되게 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거야. 아이들은 무조건 죽어야 해! 그건 정해진 운명이고 피할 도리가 없어.”
메데이아를 끌고 가는 것은 복수심이다. 그러나 복수심에 지배당하는 동안에도 메데이아는 자신이 하려는 일이 자신을 부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지르려는지 나는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내 격분이 내 이성보다 더 강력하니, 격분이야말로 인간들에게 가장 큰 재앙을 안기는 법!”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은 인간 영혼이 겪는 도덕적 갈등의 전시장이다. 복수심은 죄책감과 뗄 수 없이 얽혀 있고, 정의는 불의와 한 몸처럼 붙어 있다. 에우리피데스 비극은 이 내적 모순의 드라마를 보는 관객에게 촉구한다.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 그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사유하라.’ 그 사유가 인간을 바꾼다. 인간은 사유함을 통해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 인간다운 인간, 윤리적 인간이 된다.
20세기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사유를 촉구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거부하는 사태를 가리켜 ‘무사유’라고 불렀다. 사유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 생각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구분을 빌려 말하면, 사유에는 ‘계산하는 사유’가 있고 ‘숙고하는 사유’가 있다. 사유하지 않는다는 것은 계산함을 넘어선 차원, 곧 숙고함이 빠져 있다는 뜻이다. 아렌트는 그런 사람의 전형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게서 보았다. 히틀러의 하수인이었던 아이히만은 치밀하게 계산할 줄은 알았지만, 홀로코스트라는 죄악 앞에서 ‘숙고하는 사유’를 감행할 줄은 몰랐다. 다시 말해 자기 행위의 윤리적인 차원을 사유할 줄 몰랐다.
그렇다면 아이히만은 ‘악의 화신’이었던가.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셰익스피어 비극에 등장하는 이아고나 맥베스나 리처드 3세처럼 ‘자신이 악인임을 입증하려고 결심한 악인’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아렌트가 전해주는 일화 한 토막은 아이히만이 자신이 저지른 작은 잘못 하나를 두고 평생 괴로워했음을 알려준다. 젊은 날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모아 수용소로 보내는 일을 하던 중에 오스트리아 유대인 공동체 지도자 요제프 뢰벤헤르츠의 뺨을 때린 일이 있었다. 아렌트는 그 일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유대인 전체에 저지른 그 어떤 일에도 괴로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아이히만도 한가지 사소한 사건에는 괴로워했다. 빈에서 유대 공동체 의장을 심문하다가 그 사람 뺨을 갈긴 일이었다. 뺨을 맞는 일보다 훨씬 더 나쁜 일이 유대인에게 일어나고 있는데, 아이히만은 뺨을 때린 자기 자신을 결코 묵과하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뢰벤헤르츠는 아이히만과 함께 유대인을 강제수용소에 보내는 일을 했다. 아이히만은 보답으로 뢰벤헤르츠가 빈에서 계속 살 수 있도록 보호해주었다. 그러고도 뺨 때린 일은 아이히만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작은 잘못은 잊지 않는데 큰 잘못은 볼 줄 모르는 사람이 아이히만이었다.
12·3 내란의 수괴를 아이히만에 빗대는 이야기들이 있다. 계산은 할 줄 알되 숙고할 줄은 모르는 사유의 무능력을 지적하는 것이라면 그 비유는 적실하다. 그러나 내란 수괴와 핵심 공범에게서는 아이히만에게 있었던 것, 누군가의 뺨을 때린 일에 대한 자책감조차 찾아볼 수 없다. 윤리적 사유를 촉구하는 모든 기억을 제 편한 대로 망각하는 소시오패스,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자기만 아는 반사회적 인격장애 말고 이 우두머리를 설명할 말이 없다. 이런 파탄 난 인격을 비호하는 내란 동조 세력도 다르지 않다. 시인 김수영의 말대로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민주공화국의 적들은 반성하지 않는다. 공화국이 더 썩지 않으려면 곰팡이를 도려내는 수밖에 없다.
고명섭 | 언론인.
‘하이데거 극장-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1, 2), ‘니체 극장-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생각의 요새’, ‘광기와 천재-루소부터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썼다. 카이로스는 때·시기·기회를 뜻하며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가리킨다. 카이로스의 눈으로 철학·사상·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을 탐사하며 우리 시대와 대화한다. kallipolis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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