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혜수 스포츠부장 |
사태가 터지고 한 달쯤 지나 돌이켜 보니 혹시라도 골프가 역린이었나 싶기도 하다. 지난해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그 후 일련의 사태를 촉발한 바로 그 역린. ‘국익을 위한 거라는데, 감히 어디서’라고 격노한 대통령이 분을 참지 못한 끝에 결국 계엄 선포에 이르게 된 건 아닐지. 시곗바늘을 두 달 전으로 되돌려 보자.
지난해 11월 7일(한국시간)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제47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했다. 이틀 뒤인 9일 윤 대통령이 서울 태릉 CC에서 골프를 친 사실이 알려졌다. 다음날(10일) “트럼프에 대비한 ‘골프 외교’를 위해 2016년 이후 8년 만에 골프 연습에 나섰다”고 대통령실이 해명하면서 별것 아닐 수 있던 일이 커졌다. 대통령이 골프 좀 칠 수도 있지, 굳이 트럼프로 둘러댈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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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세한 카터 “최고 전직 대통령”
평생 ‘국민만큼 좋은 정부’ 강조
새해 벽두 더 간절해진 두 가지
해명이 무색하게 트럼프 당선 전에도 윤 대통령이 여러 차례 골프를 친 사실이 드러났다. 잇단 거짓 해명에 여론이 악화했다. 김용현 당시 국방부 장관이 나섰다. 그는 28일 국회에서 윤 대통령 골프는 “장병을 격려하는 자리”였고, “함께 라운딩한 부사관이 감격해 눈물을 글썽였다”고 주장했다. 비판 여론은 걷잡을 수 없었다. 닷새 뒤인 12월 3일 윤 대통령이 난데없는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이제 와 생각하니 골프를 치게 그냥 놔뒀어야 했다. 동반자와 필드를 걸으며 맑은 공기라도 마시는 게, 관저에 틀어박혀 극우 유튜브를 시청하거나 음주를 하는 것보다 나았을 테니 말이다.
대통령의 운동은 언론이 종종 다뤄온 주제다. 어릴 적 많이 했던 ‘관계있는 것끼리 선으로 잇기’를 한 번 해보자. 왼쪽에는 등산-테니스-야구-농구가, 오른쪽에는 김영삼-이명박-조지 W. 부시-버락 오바마가 각각 있다. 빙고. 서로 마주 보는 것끼리 이으면 된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민주산악회는 떼려야 뗄 수 없다. 이명박 전 대통령 하면 이른바 ‘황제 테니스’를 떠올리게 된다.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메이저리그(MLB) 텍사스 레인저스 구단주 출신이고, 대학 농구선수였던 오바마 전 대통령은 백악관 뒷마당에서도 농구를 즐겼다. 한때 ‘야구’ 쪽에 넣었던 윤 대통령을 이제는 트럼프 당선자와 같은 ‘골프’ 쪽으로 재분류해야겠다.
한국 언론이 단기간에 정말 많이 다뤘던 대통령과 운동이 따로 있다. 때는 46년 전인 1979년, 주인공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다. 그해 6월 말부터 7월 초까지 일주일가량 국내 일간지에 실렸던 기사 제목 일부를 옮겨본다. ‘미 대사관서 16분 동안 조깅’ ‘카터, 조깅 불편 없다’(6월 25일) ‘카터 아침 운동에도 동서양 차이’(6월 26일), ‘카터는 스포츠를 즐긴다’(6월 29일), ‘카터가 몰고 온 조깅 붐’ ‘미 장병들과 새벽 조깅’(6월 30일), ‘새벽 병영서 달리기’(7월 1일), ‘비원서 6㎞ 조깅, 로절린 여사도 함께’ ‘함께 조깅할 걸 그랬다’(7월 2일) 등. 바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조깅이다.
근엄한 절대권력자 대통령만 보던 한국민에게 한 나라의 대통령이 이른 아침부터 뜀박질한다는 건 마냥 신기한 일이었다. 방한 기간(6월 29일~7월 1일) 카터 대통령이 어디서 누구와 함께 얼마나 뛰었는지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카터 대통령 방한을 계기로 조깅은 한국의 아침 풍경과 스포츠용품 산업 지형도까지 바꿨다.
지난달 29일(한국시간) 카터 전 대통령이 100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천수, 그 이상을 누린 게 어쩌면 평생 열심히 달린 덕분일지 모른다. 같은 날 무안공항에서 발생한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에 가려 그의 별세 소식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한 사람의 인생을 두고 온전히 칭찬만 또는 비난만 할 수는 없다. 양팔 저울에 올려 내려앉는 쪽이 그 사람 인생의 본 모습에 가까울 테다. 재임 기간 주한미군 철수 정책 추진으로 그를 향한 국내의 시선이 곱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미국 남부(조지아주) 출신인데도 인종분리정책에 반대하는 등 민권운동에 앞장섰다. 임기 중에 이스라엘-이집트 간 캠프데이비드협정과 미-소간 전략무기제한협정(SALT2)을 끌어내는 등 지구촌 평화를 위해 달렸다. 퇴임 후에도 전 세계 분쟁지역을 돌며 평화의 전도사로 활약했다. 그의 저울은 칭찬 쪽으로 많이 기울 것이다.
‘최고의 전직 대통령(The best ex-president)’으로도 불린 그는 누구나 ‘국민만큼 좋은 정부(A government as good as its people)’를 가져야 한다는 신념을 평생 피력했다. 2025년 벽두, 우리에게 가장 간절한 게 어쩌면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장혜수 스포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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