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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0 (금)

진료실에서 환자의 경험과 통찰도 존중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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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은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의료 구조 속에서 환자의 역할과 기여는 무엇일까? 현재 의료 시스템은 여전히 견고한 위계 구조, 짧은 진료 시간, 그리고 환자 참여 부족 등으로 인해 환자의 경험과 목소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 의사들은 전문적인 자격을 갖추고 있지만, 환자들은 오히려 소외감을 느끼며 자신의 의견과 목소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의료 체계는 전문성의 전달을 일방통행으로 간주하여, 지식이 의료 제공자 혹은 소위 말하는 "전문가"에서 환자로만 전해진다고 여긴다. 이러한 위계적 접근은 환자의 치료와 의학적 이해를 개선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간과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만성질환과 복합질환이 증가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특히 환자의 경험과 지식을 효과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 의료 시스템 구축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단순히 이용자나 소비자로서의 환자 역할을 넘어, 그들의 기여를 어떻게 새롭게 정의할 수 있을까? 의사 수 증가와 같은 양적 논의에서 벗어나 의료 서비스의 질적 향상을 어떻게 도모할 수 있을까?

오늘 소개하는 논문은 의료 시스템이 직면한 복잡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환자를 치료의 대상으로만 보는 관점을 넘어 '지식 파트너'로 인정하고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논문 바로가기: 복잡한 만성 질환의 맥락에서 지식 파트너로서의 환자). 연구자들은 특히 복합 만성질환의 맥락에서 환자의 지식이 단순히 개인적 경험을 넘어 과학적, 사회과학적, 역사적 통찰을 포함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또한 지식 파트너로서의 환자는 임상 실무와 연구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본 논문에서 중점적으로 논의하는 두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첫 번째 사례는 복합적인 만성 건강 문제를 가진 한 트랜스젠더 환자의 경험을 중심으로, 사회적 편견이 어떻게 의료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준다. 환자는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밝힌 후 의료진이 그의 젠더 정체성에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며 실제 건강 문제를 간과했다고 말한다. 그 결과 그는 과민성 대장 증후군으로 오진되었고, 이전 치료 기록이나 의료 이력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채 단순히 "스트레스를 덜 받으라"는 조언만을 받았다. 그는 적절한 치료를 받는 데에 지속적인 어려움을 겪었으며 다른 위장병 전문의에게 접근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다행히 그는 자신의 증상과 우려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들어주는 의료진을 만나 도움을 받고 함께 협력하게 된다. 이 사례는 환자의 우려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협력적 치료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이 과정을 잘 보여주는 부분을 발췌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때쯤, 저의 오래된 ME(근육통성 뇌척수염/만성피로증후군)는 두 번의 코로나19 감염과 의심되는 롱 코비드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 그들은 제 경험을 고려하고 증상 완화를 위한 가능한 방법들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기회]를 통해 저는 이미 시도해 본 치료 방법들과 다양한 접근법에 대한 제 반응을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사]의 전문 지식, 제 몸에 대한 저의 이해, 그리고 환자 학자들과 환자 활동가들로부터 모은 지식을 결합하여, 우리는 [의사와 저는] 저에게 가장 효과가 좋을 만한 옵션들을 좁힐 수 있었습니다." (굵은 글 필자 강조)

두 번째 사례는 과운동성 엘러스-단로스 증후군(hEDS)을 가진 한 환자가 자신의 증상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 연구하고, 의사와 협력하여 효과적인 치료법을 발견한 과정을 다룬다. 환자는 자신의 증상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의학적 문헌을 찾던 중, 어느 한 의사가 시도해본 새로운 치료 경험(L-도파 치료)을 기록한 글을 접하게 된다. 이 환자는 이 치료법에 대해 더 알기 위해 현대 임상 보고서뿐만 아니라 올리브 색스의 저서 <깨어남>을 읽기도 했다. 이 자료들을 바탕으로 그는 의사에게 L-도파 치료법을 공유했고, 의료진들은 그와 협력하여 치료법을 적용했다. 그 결과 이 환자는 치료 효과를 보며 삶의 질이 크게 개선되었다. 이 사례는 환자의 과거 의료 경험, 연구, 그리고 현재 상태에 대한 이해가 의학적 효과 및 환자의 삶의 질 개선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연구자들은 오늘날 의사들이 자신이 속한 세부 분야의 연구를 따라가기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서, 환자의 경험과 지식을 활용한 협력적 접근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위의 사례들은 환자가 단순히 의료의 수동적 수혜자가 아닌, 지식의 능동적 제공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이 논문은 환자를 임상 및 연구팀에 체계적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는 롱 코비드와 같은 새로운 질병의 발생과 복합적인 만성질환의 진단 및 이해를 위한 과정에서 더욱 중요할 것이라고 말한다. 환자를 치료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기존 관점을 넘어 '지식 파트너'로 인정하는 전환은 단순히 의료를 더 '인간적'으로 만드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접근은 더 나은 치료와 의료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의료, 질병, 치료에서 누구를 전문가 혹은 권위자로 인정해왔는가? 누구를 능동적인 해결사로, 누구를 수동적이거나 의존적인 주체로 간주해왔는가? 우리는 이 논문에 비추어 우리에게 내재된 고정관념과 의료 시스템을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환자를 단순히 수혜자나 이용자의 역할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쌓아온 경험과 통찰이 존중되고 반영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때, 우리는 보다 건강하고 포괄적인 의료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 서지정보
Hsu, V. J., Moodie, M., Dumes, A. A., et al. (2024). Patients as knowledge partners in the context of complex chronic conditions. Medical Humanities, 1—5. doi: 10.1136/medhum-2024-012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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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원에서 대기 중인 환자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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